중국도자의 시점

중국도자의 시점

중국 도자기는 1만년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석기시대의 양사오仰韶문화기에는 채도(표면에 색깔을 넣어 구운 도자기), 홍도紅陶, 백도白陶가 제작되었고, 용산龍山문화기에는 흑도黒陶가 번성하였습니다.
상商왕조에는 원시청자라고도 불리는 회유도灰釉陶가 등장합니다.
춘추전국시대 말부터 전국시대에는 인문경도(印文硬陶,도장같은 걸로 무늬를 찍어서 나타낸후 질이 딱딱한 도기) 와 회유도가 제작되었습니다.
전국시대에는 진시황릉의 병마용으로 대표되는 회도(灰陶,잿빛을 띤 거칠게 만든 토기), 가채회도加彩灰陶의 용(俑,중국에서 죽은 사람과 함께 묻은 인형)이 대량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후한시대에는 부장품을 중심으로 연유도(鉛釉陶,납성분의 유약을 발라 낮은 온도에서 구운 도기)가 유행합니다.
또한, 절강성浙江省북부의 월요越窯에서 본격적인 청자가 등장하고, 삼국시대부터 남조에 걸쳐 청자의 생산이 번성하였으며, 그 중에는 독특한 조형의 신정호神亭壺와 천계호天鶏壺 등도 볼 수 있습니다.
한편, 화북華北에서는 북조北朝때에 연유도와 청자가 생산되어, 특히 북제시대에는 황유에 녹유를 더한 이채와 삼채三彩 등의 연유도와 백자의 시작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당나라 시대에는 문양과 조형에 국제적인 문화의 영향이 보여지며, 가채加彩와 삼채의 기명(器皿,음식을 담는 그릇)과 용俑이 다량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화북에서는 수隋나라 시대부터 형요邢窯에서 백자가 제작되었으며, 당나라 시대에는 정요定窯에서도 백자의 생산이 시작되었습니다
한편, 청자는 월요에서 생산이 이어졌고, 당나라 말기부터 오대五代에 걸쳐 최고급품은 비색秘色이라 불리며 청자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또한, 장사요長沙窯에서는 유하채(釉下彩, 유약밑에 그림을 그리는 방법)에 동과 철을 이용하여 주자나 반盤등이 활발히 만들어졌으며 해외에도 수출하였습니다.
북송시대에는 아백색牙白色의 유색과 유려한 편절조(片切彫,칼날을 옆으로 뉘어서 깊고넓게 파내는 기법) 등의 문양을 특색으로 하는 정요의 백자가 유행하여 각지의 가마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요주요耀州窯에서는 올리브그린의 유색을 특색으로 하는 청자가 구워졌으며, 하남성의 여요汝窯에서는 북송시대 말에 궁정용의 우아한 청자가 생산되어, 훗날 균요鈞窯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남성, 하북성, 산서성 등의 이른바 자주요磁州窯 계통의 가마가 전개되어 백화장(白化粧, 고운 백토를 얇게 바르는 것)을 활용한 다채로운 제품이 제작되었습니다.
남송시대에는 수도였던 임안(臨安, 현재의 항주杭州에 관요가 설치되어 두꺼운 유약과 검은 태토를 특징으로 한 청자가 만들어졌으며, 또한 일본에서도 전세품으로 많이 알려진 용천요龍泉窯의 청자, 건요建窯와 길주요吉州窯의 다양한 천목다완, 경덕진요景徳鎮窯의 청백자 등 각지에서 특징있는 도자기가 생산되었습니다.
원나라 시대에 경덕진에서 청화青花기술이 완성되어 산화동酸化銅을 안료로 한 유리홍(釉裏紅, 동채)이 시작되었습니다.
청화는 중근동지역을 비롯한 해외로 수출되었고, 동시에 용천요 청자도 대량으로 수출되었습니다.
명나라 시대에는 경덕진에 어기창御器廠이 설치되어 궁정용 도자기가 구워졌습니다.
홍무洪武황제 연간에는 해금정책에 의해 이슬람권에서의 코발트안료의 공급이 중단되어 유리홍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영락연간〔永楽,1403-1424〕에는 코발트안료의 수입이 재개되었습니다.
선덕연간〔宣徳,1426-1435〕에는 다양한 기법이 시도되어 활발한 생산이 전개되었습니다.
성화연간〔成化,1465-1487〕시대에는 완성도 높은 소완小碗과 소반小盤이 제작되는 한편, 두채(豆彩, 중국 관요에서 비롯된 채화)도 등장하였습니다.
가정연간〔嘉靖,1522-1566〕부터 어기창에서의 생산을 보충하기 위해 생산레벨이 높은 민요民窯에 관요제품의 생산위탁이 행해졌습니다.
다양한 오채五彩가 제작되어 엄격한 관요의 작풍이 흔들리게 됩니다.
만력연간〔万暦,1573-1620〕시대에는 오채의 종류가 현저하게 증가합니다.
한편, 경덕진의 민요에서는 킨란데(金襴手,빨강 녹색등 안료로 문양을 그린후 그 위에 금채를 칠한 기법)와 후요데(芙蓉手, 큰 접시등에 등장하는 문양의 하나로, 중앙에 능화형 창문을 두고, 그 주위로 연변문을 배치후 그 안에 꽃문이나 보물무늬등을 배치한것 ) 등이 구워졌습니다.
관요가 쇠퇴해가는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에는 민요가 활발해지고 수출지역의 취향에 맞춘 제품을 생산하였습니다.
청나라 강희연간〔康熙,1662-1722〕에는 어기창이 재개되어 단정한 궁정용 도자기가 생산되었습니다.
옹정연간 〔雍正,1723-1735〕과 건륭연간 〔乾隆,1736-1795〕에는 생산기법이 절정에 이르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