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의 역사
한국도자의 역사
이토 이쿠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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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있어서 최근 몇년의 고고학상 수확의 하나는 토기의 기원에 관한 새로운 자료의 발견이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도자의 역사는 선사시대의 원시토기를 가지고 막이 열리는데, 한반도의 경우, 빗살무늬토기(櫛目文土器)를 최고(最古)의 것으로 하는 견해가 종래의 통설이었다. 그런데, 1969년부터 71년에 걸친 釜山市 影島区 東三洞의 패총(貝塚)의 경우, 빗살무늬토기의 층(層) 아래에서 첨저・원저무문토기 (尖底・円底無文土器)와 평저융선문토기(平底隆線文土器)등이 발견되어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빗살무늬토기와는 전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고, 그 층위와 동반한 석기등으로 볼 때 빗살무늬토기보다 오래된 문화층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방사선탄소연대측정에 의하면 기원전 4000년기로 나타나고, 그것을 전제로 하는 한 서북 시베리아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해 온 빗살무늬토기보다 대폭적으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그것들 선빗살무늬토기(先櫛目文土器) 라고 이름 붙혀진 것들은 東三洞 외에 慶尚南道 新岩里와 咸鏡北道 西浦項의 패총(貝塚)등에서도 발견되었으며, 최고(最古)의 토기문화가 넓은 지역으로 확대되어 있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 중에 포함되어 있던 두립문토기(豆粒文土器)가 일본의 나가사키켄 (長崎県) 센북쿠지(泉福寺)의 동굴(洞穴)과 후쿠이(福井) 동굴등에서 발견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생각되어 온 두립문토기하고 유사한 것은 일본과 한반도 교류의 역사를 생각하는 위에서도 대단히 흥미있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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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경우 신석기시대의 토기를 대표하는 것이 빗살무늬토기이다. 이 명칭은 1930년, 후지타료사쿠(藤田亮策)氏에 의해 이름 붙혀진 것인데, 북방뉴라시아 캄케라믹(Kammkeramik)에 유사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독일어를 직역한 것이다. 「반드시 2개 이상의 선문(線又) 또는 점선(点線)이 평행으로 새겨진 것을 조건」으로 했는데, 그 뒤 조사에서 반드시 이 조건에 들어 맞지 않는 것이 있고, 또한 Kammkeramik의 내용과도 상위한 점이 차츰 밝혀져 빗살무늬토기의 호칭 대신에 유문토기(有文土器) 또는 기하문토기 (幾何文土器)라고 부르는 견해도 있다. 어찌되었든 한반도의 빗살무늬토기는 먼 스칸지나비아반도에서 발단하고, 우라루산맥을 넘어 시베리아 일대에 펼쳐진 문화와 직접 관계를 가진 것이다. 중국 동북지방에는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는 발달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북에서 남으로 문화의 전파가 빨라서 그곳에서 정착하는 기회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이것들 빗살무늬토기는 지역적이나 시대적으로 상당히 변화를 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첨저(尖底)의 반란형(半卵形) 기형이고, 구연부에 짧은 사선문(斜線文), 몸체에는 능삼문(綾杉文)과 사격자문 (斜格子文)등을 조개껍데기와 골편(骨片)으로 압인하고 또는 음각한 것이 특징이다. 상한(上限)은 거의 기원전 3000년으로 추측되고, 기원전 1000 년기의 초두(初頭)까지 한반도의 거의 전토(全土)에 걸쳐서 활발히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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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000년기에는 무문토기(無文土器)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 시대는 한반도의 경우 청동기시대와 거의 일치한다. 무늬가 없거나 또는 있어도 극히 조금있는 적갈색의 평저토기이다. 성형에는 아직 물레사용은 보이지 않고, 손빚음이나 흙타래로 쌓아 올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분포는 중국의 동북지방, 서쪽은 요하(遼河)에서 동쪽은 흑용강・송화강(黒龍江・松花江)에 걸치는 지방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고, 빗살무늬토기와는 다른 문화권이 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무문토기는 새로이 동쪽으로 전해지고, 일본의 야요이토기(弥生土器)의 모태(母胎)가 되었다.
무문토기의 유적에서는 자주 중국의 영향을 받은 흑색마연토기(黑色磨硏土器) 와 단도마연토기(丹塗磨研土器)가 출토되었다. 전자는 용산문화(龍山文化)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咸鏡北道를 중심으로 한반도의 중부・남부에서도 발견되고 어느 정도 분포는 확대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의 흑도(黒陶)와 같이 물레를 사용하지 않으며 또한 표면을 연마한 것이 적다. 후자는 양사오문화(仰韶文化)의 채도(彩陶)의 변형으로 보이는 것도 있는데, 한반도의 북부 특히 황해에 면한 지방에서 전혀 출토가 없는 걸로 봐서 중국으로부터 문화의 전파경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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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후부터 3세기 끝무렵까지를 삼한시대(三韓時代), 또는 원삼국시대 (原三国時代) 라고 부르고 있다.
이 시기에는 도질토기(陶質土器)가 발달했다. 두드려서 무늬를 나타내는 승석문(繩席文)과 격자문(格子文)등을 수반하는 고화도번조(高火度燔造)에 의한 경질토기(硬質土器)이다. 등요(登窯)나 물레의 사용도 보이고 신라토기의 선구(先駆)이기도 하다. 이 시기를 토기에서 도질토기로의 전환기로서 파악할 수도 있다.
북으로 고구려, 남으로 신라와 백제가 정립(鼎立)하는 것이 4세기부터 7세기 후반까지로 이 시기를 삼국시대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6세기전반까지 낙동강유역에 존속한 가야는 그 문화적 발달은 다른 삼국과 뒤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가야를 삼국시대에 포함시키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삼국시대의 토기는 자료적으로 갖추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거의 2종류로 대별된다. 즉, 연질회청토기(軟質灰青土器)와 경질회청토기(硬質灰青土器)이다. 이것들을 주류로 해서 각 나라가 저마다의 특색있는 도기(陶器)를 발달시켰다.
1) 고구려(高句麗)
고구려는 수도를 평양에 두고 그 위치관계에 있어서 다른 삼국과 비교하면 가장 강한 한식토기(漢式土器)의 영향을 받고 있다. 즉, 생산의 주류를 점하고 있는 것은 회청연질토기이며 흑색마연토기도 일부 보인다. 또한 표면에 채문(彩文)을 시행한 채도(彩陶)도 조금이나마 생산되었다. 고구려의 도기(陶器)에서는 황유도(黄釉陶)의 생산이 눈에 띄고, 특히 기형(器形)에서는 사이호(四耳壺)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2)백제(百済)
백제는 처음에 수도를 한성(서울)부근에 두었지만, 그 뒤 공주, 또 한번 부여로 천도 (遷都)했다. 그 동안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경질회청토기이며, 도질토기(陶質土器)의 전통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 외에 연질적갈색토기(軟質赤褐色土器)와 고구려와 같은 흑색마연토기 (黒色磨研土器)도 생산되었다. 도기는 부여시대의 후반인 7세기경이 되어서 녹유도(緑釉陶)의 생산이 시작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토쿄국립박물관에 있는 녹유장경병(緑釉長頸瓶)으로 아름다운 유색(釉色)・기형(器形)・시문(施文)에서 당시의 기술 수준을 볼 수 있다. 백제에 관해서는 토기・도기의 발전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 고분에서 중국・월주요청자가 발견된 것에 주목하고 싶다. 즉, 忠清南道 天安市 城南面 花城里에서 천계호(天鶏壺)와 반구호(盤口壺), 江原道 原州市 富論面 法泉里 2호 고분에서 양형기(羊形器), 忠清南道 公州郡 公州邑 宋山里・武寧王陵에서 광구육이호(廣口六耳壺)・반구장경사이호(盤口長頸四耳壺)・등잔(燈盞)등이다. 이것들은 백제가 중국 남조(南朝)와의 교류에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3)고신라(古新羅)・가야(伽耶)
고신라는 경주지방, 가야는 낙동강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며, 그 토기생산은 서로 공통되는 점이 많다. 이것들은 고구려의 토기와는 다르며 백제토기와도 조금 상이한 면을 보이고 있다.
이들 지방에서는 연질적색토기(軟質赤色土器)가 보편적으로 보이지만, 그것과 동시에 경질회청토기(硬質灰青土器)도 대량으로 만들어졌다. 기형・무늬와 함께 다양화하고 정교함이 극에 달한 것도 있다. 이 시대에서 더욱 주목하고 싶은 것은 토우(土偶) 및 이형토기(異形土器) 라고 일컫는 오리(鴨)・기마인형(騎馬人物)・차륜(車輪)등의 부장품으로 그 독특한 조형은 고대토기 중에서도 유달리 이채(異彩)를 띠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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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가야를 병탄(併呑)하고 백제에 이어서 고구려를 석권해서 한반도를 통일한 것은 668년의 일이다. 그 후 935년에 신라 최후의 경순왕(敬順王)이 고려에 항복하기까지 약270년간에 걸친 통일신라시대는 중국・당의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일대 문화국가를 형성했다. 그것은 동시에 불교에 치우친 시대로 8 세기에는 불교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특히, 불국사와 석굴암은 그 때의 대표적인 건조물(建造物)이며 신라미술의 정수를 지금에 전해주고 있다. 도자기에 대해서도 불교의 영향이 확실하게 보이며, 그것은 화장골호(火葬骨壺)에 전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8세기경의 골호(骨壺)는 무유(無釉)의 회청경질토기의 표면전체에 여러가지 무늬의 인화문(印花文)을 압인(押捺)하고, 독특한 장식효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황갈유(黄褐釉)와 황녹유(黄緑釉)등의 저화도연유(低火度鉛釉)를 입힌 골호도 적지않게 번조되었다. 그 외에, 부장토기(副葬土器)에 대해서는 출토유물이 충분하지 않아 그 변천과정은 확실하지 않다. 단지, 특기할 것은 1970년대의 「慶州綜合開発計画」의 일환으로서 1975년부터 76년에 걸쳐서 실시된 慶州市 仁旺洞에 있는 雁鴨池의 발굴조사에 의해 20,000점에 이르는 유물이 출토되었고, 그 중에 2,000점 가까이 토기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들 토기는 대부분이 일상용기이고, 종래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기형도 보이기 시작하여 통일신라토기의 자료에 풍부함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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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는 918년에 왕조가 건립되어 1392년에 멸망하기까지 475년의 오랜 세월에 걸친 시대이다. 그 동안 도예기술은 눈에 띄는 진보를 달성하고, 한국도자사에 있어서 황금시대를 구축했다. 그것은 청자중심의 기술확립의 시기로서 파악할 수 있다. 고려청자의 기원에 대해서는 현재 아직도 해명되지 않은 부분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월주요청자의 영향을 받아서 발달한 것은 오늘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최성기의 고려청자를 번조한 생산지의 중심지 중의 하나는 全羅南道 康津郡 大口面 沙堂里이고, 그 부근 150여개소에 이르는 가마터에서 초기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청자의 변천과정을 연속적으로 찾아 볼 수가 있다. 그 중 최고(最古)라고 여겨지는 것이 大口面 龍雲里등의 가마터이고, 그곳에서 월주요청자와 유사한 것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특히, 「해무리굽」과 쌍앵무문등의 선각문양등 양자의 구별짓기가 어려울 정도로 유사하다. 이와 같은 해무리굽은 또한 京畿道 龍仁郡 二東面 西里의 백자가마터에서도 발견된다. 이 「해무리굽」을 동반하는 사발의 양식은 8세기경부터 오대(五代)에 걸쳐서 월주요에서 볼 수가 있고, 언제쯤 한반도에 그 기술이 전파되었는가에 대해서는 9세기전반설 부터 11세기전반설에 이르기까지 여러 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뒷받침해 줄 확실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정설로 하는 것은 없지만, 10세기전반으로 보는 설이 현재의 단계에서는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또한 고려시대에 있어서 도자 생산을 담당한 곳인「瓷器所」의 성립과도 합해서 고찰해야만 할 것이다. 고려시대에 있어서 도자등의 특정산물은 왕실직할의 「所」라는 생산조직에서 조달되고 있었던 것이 최근 몇년에 명확하게 되었으며, 그 「所」의 성립이 10세기중으로 추정되고 있는 것이다. 어찌하였든 10세기대에 청자생산의 태세는 충분히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11세기는 그 후반에 이르러 그때까지 거란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정식적인 통교를 보류하고 있었던 송과의 관계가 수복되어 활발하게 송의 문물이 들어온 시기이며, 도자기에 대해서도 월주요뿐만 아니라 여요(汝窯)와 정요(定窯)등 많은 중국도자의 기술을 섭취하고, 도자발전의 기초를 확고히 한 시기라고 추측된다. 그리고, 이윽고 12세기의 최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선화5년(1123) 고려의 수도・개성을 방문한 중국사절단의 일원인 서긍이라는 인물이 저술한 여행견문록『고려도경(高麗圖經)』에 그 때의 도자에 관한 몇 개의 기술이 보인다. 그것에 의하면 청자의 아름다운 것은 비색(翡色)으로 불리고, 도금의 그릇이나 은그릇등 보다도 귀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 「정절(精絶)」이라고 나타낼 정도로 정교히 조각한 무늬를 동반한 것이 제작되었다는 것, 중국의 汝窯・定窯등의 제품에 유사한 것이 있었다는 것 등을 전하고 있다. 또한 왕릉의 발굴 예에 의해서도 12세기전반의 비색청자(翡色青磁)가 유례 없는 아름다운 유색을 나타내고 있었다는 것이 뒷받침되고 있다. 또한 동시에 고려독자라고도 일컫는 상감청자(象嵌青磁)를 창출하고 있다. 상감기법 그것은 이미 당(唐)시대의 중국도자에 보이는데 그것은 대단히 드문 예이고, 12세기 중엽부터 14세기말까지 도자생산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던 상감청자는 역시 고려의 특유한 장식 기법이었다고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청자유(青磁釉)의 아래에 펼쳐지는 백흑상감무늬는 선명하고 아름다우면서도 깊고 조용하며 우아한 정취를 가지고 있다. 이것들 비색청자와 상감청자의 우수한 작품은 全羅南道 康津郡 大口面 沙堂里와 全羅北道 扶安郡 保安面 柳川里의 2개소를 중심으로 주로 생산되었다. 12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이 외에 철안료로 무늬를 그린 철화(鐵畵), 백토로 문양을 그린 퇴화(堆花), 산화동(酸化銅)의 안료로 무늬를 그린 진사(辰砂), 청자의 유약 아래에 철사안료를 바른 철채(鐵彩), 세 종류의 흙을 혼합한 연리(練理)등, 금을 덧붙힌 금채(金彩)등, 여러가지 종류의 청자가 만들어졌다. 또한 조금이지만 백자도 柳川里에서 생산되었다.
그러나, 그후 1231년이래 몽고군의 침략이 연달아 30년정도 계속되는 동안 강화도에 천도(遷都)하는 등 고난의 시기를 맞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감청자는 14세기말경까지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적어도 1365년부터 1374년에 이르기까지 관요(官窯)인 瓷器所가 존속하고 있었던 것은 고려 공민왕의 왕비의 능묘인 「正陵」명을 가진 청자의 접시가 존재하고 있는 것에서도 추측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이미 재질(材質)・성형(成形)・시문(施文)・번조(燔造)등 모든 점에 있어서 쇠퇴한 모습을 보이고 있고, 머지않아 조선시대의 분청(粉青)으로 다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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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부터 시작되어 1910년에 끝나는 장대한 조선왕조의 역사 중에서 도자의 생산이 어떻게 전개되고 성쇠했는가를 명확하게 더듬어 조사해 가는 것은 지금의 자료로서는 불충분한 점이 있으며, 조선시대의 도자역사는 아직도 그 전모를 드러내기에는 도달해 있지 않다. 그러나, 이 500년 정도의 장대한 기간을 조감(鳥瞰)해 볼 때, 처음에는 몇개의 흐름(粉青・白磁・白磁象嵌・青花・黒釉・灰釉・泥釉등)이 있는 것 중에서 2개의 흐름(粉青과 白磁)이 돌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도중부터는 그 흐름의 하나인 (粉青)이 단절됨을 보인다. 한 개 남은 (白磁)가 최후까지 몇개의 지류(青花・鐵畵・辰砂)를 수반하면서 도도(滔滔)하게 흘러 계속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전기를 대표하는 것은 분청이다. 1940년, 한국의 미술사학가인 고유섭(高裕燮)氏에 의해 이름 붙혀진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青沙器)」의 약칭으로, 오늘날 구미에서도 buncheong(粉青)으로서 관용화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흔히 「미시마(三島)」라 총칭하고, 때로는 「미시마(三島)」와 「하케메 (刷毛目:귀얄)」로 나눠서 부르는 경우도 있다. 철분을 포함한 회청색의 태토로 성형하고, 청자유약과 비슷한 유약을 입혀 고화도에서 번조한 점에서 고려청자의 기법을 그대로 전승하고 있다. 사실 상감무늬를 시행한 것에 대해서는 고려의 상감청자와 구별하기가 곤란하므로, 향후의 조사에 의해서 그 편년을 새롭게 고치지 않으면 안되는 가능성도 있다. 분청의 대부분은 단 한가지 유약 아래에 백토로 분장을 하고, 거기에 가지각색의 수법으로 무늬를 표현하는 것으로 고려청자와 뚜렷하게 구분짓고 있다. 그에 따라 무늬도 또 전혀 새로운 조선적인 디자인으로 변모한 것이다.
분청은 그 시문(施文)방법에 따라 다음과 같은 타입으로 분류할 수 있다.
- 1.상감(象嵌) [선상감(線象嵌)・면상감(面象嵌)・역상감(逆象嵌)]
- 2.인화(印花)
- 3.백지(白地) [귀얄・박지(剝地)・조화(彫花)・철화(鐵畵)]
- 4.분장(粉粧)
15세기전반에는 사원(司院)이라는 관사(官司)가 도자의 생산을 담당하고, 그 산하에 자기소(磁器所)가 139개소, 도기소(陶器所)가 185개소, 합계324 개소의 생산조직이 있었던 기록이 『世宗実録地理志』에 볼 수 있다. 자기소와 도기소에서 각자 어떠한 종류의 도자를 생산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현재 여러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백자가 자기소의 일부에서 생산되고 있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15세기의 백자는 중국의 백자의 기술을 도입해 순백처럼 빛나는 백자를 만들어 냈다. 그것들은 궁중용, 또는 중국에 진공용(進貢用)으로 제작된 것으로 『용제총화(慵斎叢話)』라는 15세기후반경의 수필집에도 「世宗朝(1419−1450)의 어기(御器)는 오로지 백자를 사용한다」라는 기술이 있다. 이것들 상질(上質)의 백자는 139개소의 자기소 중에서 京畿道의 광주(広州)와 慶尚道의 상주(尚州) 및 고령(高霊)의 3개소에 한정되어 있었는데, 이윽고 질좋은 백자 태토의 부족을 초래하고 15세기 후반에는 백자의 민간사용이 금지되기까지에 이르렀다.
또한 15세기중반부터 백자의 유약 밑에 무늬를 그리는 청화자기(青花磁器)가 광주 관요의 하나인 広州郡 中部面 道馬里등에서 제작되었다. 이것들의 그림 그리기에는 화원(画院)의 화가가 파견되어 붓을 들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것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뛰어난 필치로 梅・竹・松등을 그린 청신(清新)의 기풍이 넘치는 것이 많다. 그러나, 모두 궁중의 어용품(御用品) 이었고 민간에 널리 미칠 정도의 대량 생산된 것은 아니었다.
16세기의 도자생산의 상황은 현재 아직 충분히 알지는 못하며 향후 새롭게 자세한 자료를 기다리는 중이다.
1592년・1597년의 임진왜란・ 정유재란에서 1627년・1636년의 정묘・병자호란까지 거의 40년 동안은 조선시대의 역사 중에서도 政治・経済・社会・文化등 모든 면에서 정체를 보인 암흑시대이며, 도자생산에 대해서도 큰 단층이 생겨난 시기이다. 이 시기의 전후로 도자의 양상이 완전히 바뀐다. 그 최대의 현상은 전기에 활발히 생산되었던 분청의 소멸이다. 그리고, 그 시기 이후 백자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각지에서 백자의 가마가 발생하고 조질의 백자가 생산되는 한편, 관요는 京畿道 広州地方에 집약하게 된다. 그 곳에서는 전기와 다른 기형(器形)・유조(釉調)・무늬의 백자와 청화가 만들어졌다.
특히, 청화는 그 억제된 과묵함과 꾸밈없고 성실한 표현으로 중국도자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난 조선시대 독자의 미(美)의 세계를 완성했다. 前韓国国立中央博物館의 鄭良謨氏, 尹龍二氏의 면밀한 조사연구에 의해 17세기전반부터 18세기에 이르는 광주 관요의 실태가 명확하게 되어가고 있으며, 조선시대 중기의 도자의 해명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17세기에는 또한 광주(広州)와 忠清北道 괴산(槐山)등에서 유약 밑에 철안료로 그림을 그리는 철화(鐵畵)가 활발하게 되고, 18세기에 들어오면 동(銅)을 포함한 안료로 그림을 그린 진사(辰砂)가 만들어졌으나 辰砂의 생산지는 아직도 불명확하다.
1752년 관요는 京畿道 広州郡 南終面 金沙里에서 分院里로 이설하였다. 이 해 이후 1883년에 분원리요가 관요에서 민요로 이관되기까지를 조선시대 후기로 구분하고 있다. 분원리요에서는 가지각색의 기교가 전개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건륭(乾隆)경의 청조문화(清朝文化)의 융성에 의한 자격(刺激:자극을 받아 크게 움직임)과 英祖・正祖라는 영민하고 비범한 국왕의 치하에 있었던 것도 영향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중국에서의 코발트안료의 수입이 윤택하게 되자 청화의 제작이 활발하게 된 것은 주목된다.
도자의 용도에서도 주기(酒器)・식기・문방구・화장도구를 시작해 베갯모・촉대・해시계・저울・화분・흡연구등 여러갈래로 나뉘어 있다. 무늬도 다양하게 되고 묘법(描法)은 복잡하고 번거로움이 겸하게 되었다. 철화(鐵畵)・진사(辰砂)・청화채(靑華彩) 또는 그런것들의 병용도 보이고, 장식적 효과를 겨냥하게 되어 도자기의 공예품화가 진행되었다. 19세기후반이 되면 미국・프랑스・일본등 외국열세의 침입으로 국정은 흐트러져 1883년 광주 관요의 최후의 울타리인 분원리요도 드디어 민요(民窯)로 이관되어 500년에 걸친 영광의 역사를 마감하게 된다.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명예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