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의 역사

일본도자의 계보

코바야시 히토시

1. 토기

죠몬토기(縄文土器)

일본도자의 역사는 세계 최고(最古)의 토기라고 일컫는 죠몬토기(縄文土器) 에서 시작된다. 죠몬토기의 이름은 오모리카이즈카(大森貝塚)의 발굴로 알려진 E.S.모스가 사용한 Cord marked pottery에서 유래된다. 방사성탄소(C14) 측정에 의하면 최고(最古)의 것은 약 1만2천년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만년이상 계속된 죠몬토기는 그 기형의 변화에 의해 크게 6개의 시기구분(초 창・조기・전기・중기・후기・만기)으로 나눠지고, 게다가 지역적으로도 상세하게 편년되어 있으며 한마디로 죠몬토기라고 해도 그 실체는 가지각색이다. 초창기의 두채문토기(豆粒文土器)와 융선문토기(隆線文土器), 중기의 화염형토기(火焰形土器), 후기의 카메가오카식토기(亀ヶ岡式土器), 거기에 중기부터 만기에 걸쳐서 토우(土偶)등이 대표적이다. 죠몬토기는 일반적으로 흙타래를 쌓아 올려 만드는 방법이 채용되어 있으며, 가마를 구축하지 않은 노천가마에 의한 번조방법으로 800~900도 전후에서 구워졌다.

야요이토기(弥生土器)

죠몬토기에 이어지는 것이 야요이토기(弥生土器)이며, 기원전 3세기경에 키타큐슈(北九州)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명칭은 1884년의 토쿄・혼고(本郷)의 야요이쵸무코가오카패총(야요이쵸유적) [ 弥生町向ヶ丘貝 塚, (弥生町遺跡)]의 발견에서 유래된다. 종래의 수렵・채집생활에서 농경생활로의 변화가 야요이토기 탄생의 하나의 요인이고, 농경생활에 맞는 기종(器種)도 등장하여 저장용의 항아리, 취사용의 독(甕), 식기용의 고배(高杯)등이 기본적인 조합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일부의 기종이나 장식등에 죠몬토기의 전통이 보인다. 야요이토기는 전기・중기・후기의 3기로 나뉘어져 있으며, 특히 전기의 옹가가와식토기(遠賀川式土器), 중기의 스구식토기(須玖式土器)가 대표적이다.

하지키(土師器)

야요이토기의 후신(後身)이 코훈(古墳)시대의 하지키(土師器)이며 그 이름은 헤이안시대의 『倭名類聚抄』와 『延喜式』등의 문헌에 유래하지만, 실제로는 코훈(古墳)시대 이후 고대의 초벌구이토기의 총칭으로 되어 있다. 코훈시대의 하지키(土師器)는 죠몬토기나 야요이토기와 같이 흙타래를 쌓아 올리는 성형과 저화도(低火度) 산화염번조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기종구성은 야요이토기 그대로를 답습하고 있다. 하지키의 용도는 제사용과 일상용으로 대별되는데, 스에키(須恵器)의 출현에 크게 영향을 받아 기본적으로 저장용은 스에키(須恵器), 취사용은 하지키(土師器)가 이용되게 되었다.

스에키(기・경질토기) [須恵器,(器・硬質土器)]

스에키는 한반도의 도질토기(陶質土器)의 계통에 속하며 그 영향은 초기의 기형에 짙게 나타나고 있다. 스에키의 등장은 일본도자사에 있어서 최초의 기술혁신이었다. 즉, 굴가마(窖窯)의 채용, 물레성형에 의한 대량생산, 고화도의 환원염번조등이다. 이렇게 한반도로부터 초래된 새로운 도자제조기술은 그 원류가 중국 은(殷)시대의 회도(灰陶)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스에키의 생산지로서 유명한 것이 오사카 남부의 구릉에 확대된 스에무라 고가마터군(陶邑古窯跡群)이며, 코훈시대의 5세기초두부터 그 활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기술은 후에 전국으로 확대되어 갔다. 7세기이후 중국과 한반도의 금속기를 모방한 기형으로 조형적인 큰 변화을 보았다. 나라시대(奈良時代)말에 새롭게 출현한 회유도기(灰釉陶器)나 시유도기(施釉陶器)가 유행하면서 스에키생산은 쇠퇴의 방향으로 향하는데, 반대로 그 기술은 나중의 중세도기의 기초가 되었다. 스에키는 중세의 야키지메도기(燒締陶器: 유약을 바르지 않고 딱딱하게 구운 도기)와 함께 구미의 스톤웨어(Stoneware)의 번역어인 석기(炻器)의 일종에 분류되는 경우가 있다.

중세・근세의 토기

6세기경부터 동일본(東日本)에서는 하지키의 지류라고도 할 수 있는 흑색토기(黒色土器)가 새롭게 출현하며, 또한 8세기부터는 스에키생산이 쇠퇴한 키나이(畿内:교토부근)서쪽에서도 그 생산이 시작되었다. 특히 서일본(西日本) 에서는 11세기이후 그 흑색토기의 후신(後身)이라 할 수 있는 사발과 접시를 중심으로 한 와기(와질토기)[瓦器,(瓦質土器)]가 대량생산 되었다. 하지키는 중세가 되면 공선용(供膳用)의 작은접시나 남비・가마솥 종류가 주체가 되고, 이것들은 토기술잔이나 질냄비등으로 중세・근세를 통해서 계속 생산되어 현재까지 이른다.

2. 도기

고대의 도기

일본에 있어서 도기의 시작은 7세기후반에 출현하는 녹유도기(緑釉陶器)를 시작으로 하는 일련의 시유도기(施釉陶器)이다. 어느 것이나 중국과 한반도의 영향이라는 수동적인 것이었지만, 거기에는 선진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해 갈려고 했던 일본의 고대국가 초창기의 활력과 중국・한반도문화의 동경을 느낄수 있다.

나라・헤이안시대(538~794)의 도기는 삼채(三彩)나 녹유(緑釉)를 입힌 저하도연유도기(低火度鉛釉陶器)와, 고화도번조의 회유도기로 구별할 수 있다. 전자는 중국의 당삼채나 한반도의 녹유도기의 영향 아래서 태어난 것으로, 쇼소인삼채(正倉院三彩)에 대표되는 나라삼채(奈良三彩)와 녹유도기라는 채유(彩釉)가 시행된 도기이며, 당시「자(瓷)」,「자기(瓷器)」, 또는 「청자(青瓷:아오시)」로 불리어지고 있었던 것을 문헌에서 알 수 있다. 한편, 후자의 회유도기는 8세기후반부터 아이치켄(愛知県)의 사나게요(猿投窯) 에서 본격적으로 그 생산이 시작되고, 당시 「백자(白瓷:시라시)」라고 불리고 있었다. 이것들이 인공적인 유약을 시행한 일본에서 최초의 도자기이다.

(1)채유도기(彩釉陶器)

채유(彩釉)는 연유(鉛釉)를 기초로 동(銅)・철(鐵)・백석(白石)등을 정색제(呈色剤)로 해서 녹색・황색・백색등으로 발색시킨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의하면 이미 5세기에 중국의 영향에 의해 녹유도기를 생산하고 있었던 한반도의 영향을 받아 7세기후반에 일본에서도 녹유도기가 삼채도기보다 선행해서 생산이 시작되었다.

나라삼채의 견본이 되었던 중국의 당삼채는 사원(寺院)유적을 중심으로 한 일본각지의 유적에서 출토하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주로 부장품이던것이 일본에서는 주로 불기(仏器)로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가지각색의 기형으로 알려진 나라삼채는 제사관계 유적에서 출토하는 예가 많고, 그 특수한 용도가 엿보인다. 유명한 쇼소인삼채(正倉院三彩)도 본래는 도다이지(東大寺) 의 의식용 생활품으로 텐뵤쇼호4년 [天平勝宝4年,(752年)]의 대불개안회 (大仏開眼会)등에서 사용된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화장장골기(火葬蔵骨器) 의 출토 예도 많고, 약호(薬壺)로 불리우는 독특한 기형이 특징이다. 이것들 나라삼채는 도시의 관영공방(官営工房)에서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나라삼채는 8세기후반이 되면 자취를 감추고, 대신에 이채(二彩)나 녹유의 도기가 중심이 되자 질적으로 조질화되었다. 9세기초두의 헤이안시대 (794~1185)가 되면 녹유만 있는 단채유도기(単彩釉陶器)가 성행한다. 헤이안시대의 녹유도기의 생산지로서는 아이치켄(愛知県)의 사나게요 (猿投窯)・비호쿠요(尾北窯)와 야마구치켄(山口県)의 나가토요(長門窯)가 알려져 있다. 또한 그 조형은 주로 금속기를 모방한 것이 많고, 당시 수입되기 시작한 중국의 월주요계통의 청자를 모방한 것도 알려져 있다. 녹유도기 유행의 배경에는 이러한 금속기나 중국산 청자로의 동경과 그 대용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헤이안시대의 녹유도기는 11세기전반에 거의 그 모습을 감추었다.

(2)회유도기(灰釉陶器)

회유도기는 식물의 재(灰)를 원료로 한 유약을 사용한 고화도번조에 의한 경질(硬質)의 시유도기(施釉陶器)이다. 8세기후반경부터 스에키(須恵器)의 제작기술을 기초로 아치켄(愛知県)의 사나게요(猿投窯) 에서 그 생산이 시작되었다. 스에키에 있어서는 벌써 자연유의 출현을 보고 있었는데, 이것은 가마안에서 재가 내려앉아 그것이 결과적으로 유약을 입힌 것처럼 된 이른바 우연의 산물(産物)이었다. 그러나, 경험적 지식에 의해서 차츰 자연유를 의식한 가마내의 배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단계의 자연유를 원시회유(原始灰釉)라 부르고, 자연유와 회유의 중간 위치에 있다고 하지만 그 판별은 반드시 명확하지 않다.

회유도기는 사나게요를 중심으로 하는 아이치켄 서북부에서 기후켄(岐阜県) 남부에 걸친 오와라・미노(尾張・美濃)지역, 그리고 더 멀리 동해지방으로 확대되었다. 처음의 제품에는 스에키를 모방한 것이 많아서 장경병(長頸瓶)・수병(水瓶)・단경호(短頸壺)등이 알려져 있다. 또한 중국의 월주요계통의 청자등도 모방했다. 사나게요는 11세기말경이 되자 회유도기의 생산에서 대량소비용의 야마자완(山茶碗)의 대량생산으로 크게 전환하고, 또한 동해지방에서도 12세기에는 회유도기가 모습을 감춘다.

중세의 도기

일본도자사에 있어서 중세는 헤이안(平安)말기부터 카마쿠라(鎌倉)・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에 걸친 시기를 가르키고, 고대의 요업(窯業)생산의 계보를 이어가면서도 새로운 요업체제가 확립된 시기이다. 하지키(土師器)계통의 토기가 계속 만들어지는 한편, 다음과 같은 스에키계통과 자기(瓷器) 계통 이라는 2종류의 도기가 생산되었다.

(1)스에키계도기(須恵器系陶器)

헤이안시대의 스에키기술을 기반으로 해서 생겨난 중세도기에는 스에키와 같은 환원염번조에 의한 회흑색(灰黒色)의 도기와 산화염번조로 변한 적갈색의 도기 2종류가 있다. 전자는 스즈요(이시카와켄) [珠洲窯, (石川県)]을 필두로, 우오즈미요(효고켄)[魚住窯,(兵庫県)]이나 카메야마요 (오카야마켄)[亀山窯,(岡山県)]등이 알려져 있고, 한편 후자를 대표하는 것은 비젠야키(오카야마켄)[備前燒,(岡山県)]이다. 어느 가마나 항아리・독・스리바치(擂鉢:질그릇으로 된 양념절구)를 중심으로 한 기종 구성이며, 하지키계통의 토기와 함께 일상집기가 기본이 되었다. 즐목문(櫛目文)과 타날문(打捺文)등의 무늬 장식과 회흑색의 표면으로 독자적인 풍격을 만들어 낸 스즈(珠洲), 독특한 붉은 빛을 띤 흙의 색깔과 중후감이 있는 조형을 특징으로 하는 비젠(備前)는 같은 스에키계통이기는 하지만 각각 전혀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카마쿠라(鎌倉)시대전기에는 환원염번조에서 산화염번조에 의한 야키지메도기(燒締陶器:고온에서 구운 유약이 없는 도기) 의 생산의 전환에 성공한 비젠(備前)이 근세로 그 전통이 계승되어 가는 것에 비해 환원염번조의 스즈요(珠洲窯)는 에치젠(越前)에 압도당해 그 모습을 감추고 양자는 운명을 달리했다. 이들 스에키계통의 도기는 고화도에서 유약없이 구워진 것으로 스에키와 같은 그릇의 범주로 분류되는 경우가 있다.

(2)자기계도기(瓷器系陶器)
(a)야마자완요계도기(山茶碗窯系陶器)

11세기말에 모습을 감춘 회유도기를 대신해 등장하는 것이 야마차완가마의 무유조제도기(백자계도기)[無釉粗製陶器,(白瓷系陶器)]이며, 그 생산은 동해지방 일대에 확대되었다. 야마자완은 일반적으로 교키야키(行基燒),  토시로야키(藤四郎燒)라고도 불리며 대량생산에 의한 무유(無釉)의 일상적인 잡기이다. 처음에는 회유도기계의 사발이나 접시 중심으로 대량생산 되었지만, 차츰 중국제백자를 모방하는 것이 늘어 사이호(四耳壺)등의 기종도 등장했다.  아이치켄(愛知県)을 시작으로 기후(岐阜)・미에(三重)・시즈오카(静岡)등 현재까지 2000기 이상의 가마터가 알려져 있다.  15세기중무렵까지 그 생산은 계속되었다.

(b)야키지메도기(燒締陶器:고온에서 구운 유약이 없는 도기)

11세기말부터 12세기에 걸친 헤이안시대말부터 항아리・독・스리바치 (擂鉢:질그릇으로 된 양념절구)를 중심으로 하는 「무유(無釉)」의 야키지메 도기의 대량생산이 토코나메(常滑)・아쯔미(渥美)[ 아이치켄 (愛知県)]을 시작으로 에치젠(후쿠이켄)[越前,(福井県)]・시가라키(시가켄) [信楽,(滋賀県)]・탄바(효고켄)[丹波,(兵庫県)]・카가(이시카와켄)[加賀,(石川県)]등 동해지방에서 북륙(北陸)・동북(東北)지방 게다가 서일본 각지에서 시작된다. 그 곳에서는 고대의 회유도기 제작기술을 답습하면서 산화염번조에 의한 석기(炻器)질의 경질도기가 만들어졌다. 문자 그대로 무유(無釉)는 아니고 자연유가 때때로 보이 는데,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큰 매력으로 되는 경우가 많다. 이미 유약이 장식 효과로서 상당히 인식된 것을 엿볼 수 있다. 한편, 각문호(刻文壺)로 불리우는 야마토에(大和絵)를 반영한 각종무늬가 그려진 항아리도 많이 구워졌다. 또한 경통외용기(經筒外容器)로서 혹은 화장골(火葬骨)을 납입하는 장골기(蔵骨器)로서 사용되어 출토되는 예도 많다.

(c)시유도기(施釉陶器)

세토(瀬戸)・미노(美濃)는 중세요업의 경우 중심지의 하나이며, 중세에서 유일하게 시유도기를 생산한 가마로서 특필된다. 세토(瀬戸)의 경우 도기생산의 시작에 대해서는 사나게요(猿投窯)나 야마자완요(山茶碗窯)를 기초로 12세기에 확립되었다고 생각된다. 세토에서는 그 전까지의 회유와 더불어 철유와 갈유(褐釉)를 사용하고, 압출양각・음각문・첩화문(貼花文) 등의 장식기법을 구사하면서 북송에서 원・명에 걸친 청자(용천요계)와 백자・청백자(경덕진요계)를 중심으로 한 중국도자의 모조품을 활발하게 만들었다. 세토요의 제품은 일상생활용구부터 불기(仏器)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우며, 사이호(四耳壺)・병자(瓶子)・수주(水注)등의 고급그릇도 13세기이후에 구워지고 수입중국도자와 함께 부유계층의 수요에 호응했다. 또한 카마쿠라후기부터 무로마치시대에 걸쳐서 「다도(茶の湯)」의 발흥과 카라모노(唐物:중국산 수입품) 취미를 배경으로 14세기부터는 중국도자의 모방품인 천목다완(天目茶碗)과 찻통(茶入) 등의 차도(茶陶:다도에 사용되는 도자기)도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5세기가 되면 세토계시유도기(瀬戸系施釉陶器)의 생산 중심은 기후켄(岐阜県)의 히가시미노 (東美濃) 로 옮겨졌다.

근세의 도기
(1)무로마치(室町)・모모야마(桃山)시대의 도기~차도(茶陶)의 융성
(a)세토계시유도기(瀬戸系施釉陶器)~세토(瀬戸)・미노(美濃)

무로마치시대후기부터 종래의 중국도자 모방품과는 전혀 다른 제품이 미노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 대표가 세토쿠로(瀬戸黒)와 키세토(黄瀬戸)이다. 전자는 반원통형(半筒形)의 다완으로 칠흑(漆黒)의 유색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며, 후자는 황유(黄釉)와 담반(胆礬)으로 불리는 녹유(緑釉)을 특징으로 한 독특의 감촉과 단정한 조형을 가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제품이 생겨난 배경에는 다도에 있어서 종래의 카라모노지향(唐物志向)에 비해 「와비스키(侘び数寄)」[와비차,(侘び茶)] 로 불리는 가치관이 교토(京都)와 사카이(堺)등의 마치슈(町衆:도시내 유력자) 사이에 대두하고, 그 가치관에 걸맞는 제품의 수요가 있었던 것에 의한다. 그 이후 즉 무로마치말부터 모모야마시대에 걸쳐서 특히 다도에 있어서의 와모노(和物:일본산 도기)의 지위는 비약적으로 상승하고, 와모노(和物) 차도 (茶陶) 생산의 융성으로 이어져 갔다. 그것과 동시에 이른바 「고려다완(高麗茶碗)」을 시작으로 한 한반도의 도자기도 크게 유행하고, 와모노차도(和物茶陶)의 작풍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세토・미노에서는 종래의 반지하식의 굴가마(窖窯)에서 고화도번조와 대량생산이 가능한 반지상식의 굴가마인 오가마(大窯)로 전환이라는 기술혁신이 무로마치시대 후기부터 행해졌다. 그 결과 미노요(美濃窯) 에서는 텐쇼(天正, 1573~92)부터 분록쿠・케이쵸연간(文禄・慶長年間, 1592〜1600)에 걸쳐서 세토쿠로(瀬戸黒)・키세토(黄瀬戸)와 더불어 장석유(백유)[長石釉,(白釉)]에 의한 일본 최초의 백색도기에 철화로 그림을 그린 시노(志野)도 등장하고, 다완을 중심으로 새로운 각종 식기에 이르기까지 그 생산은 확대되었으며 모모야마도기(桃山陶器)의 일대생산지가 되었다. 특히 미노(美濃)에서 케이쵸연간(慶長年間, 1596~1614)중반경에 카라츠(唐津)에서 열효율이 좋은 연방식등요(連房式登窯)을 도입한 모토야시키가마(기후켄 토키시)[元屋敷窯,(岐阜県土岐市)]가 구축된 것은 수요증가에 따른 대량생산의 추진이 큰 요인이었다. 열효율의 개선으로 인해 거기에 적합한 오리베야키(織部燒)의 생산이 이후 증대했다. 선명한 녹유와 철화를 병용하고, 또한 일그러진 미(美)를 강조한 기발한 조형을 특징으로 한 오리베야키(織部燒)는 난방(南蛮:동남아시아)취미의 디자인과 쯔지가하나(辻が花)라는 복식디자인등 시대의 최선단의 문화를 도입하면서 일대양식을 만들어내어 도자기에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했다. 오리베야키의 이름은 장군다인(武将茶人)인 후루타오리베(古田織部, 1543~1615)에 유래하며, 다인(茶人)이 문화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시대성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b)연질연유도기(軟質鉛釉陶器)~라쿠야키(楽燒)

교토에서는 센노리큐(千利休, 1522~91)의 지도 아래 초대 쵸지로(長次郎,?~1589)에 의해 라쿠차완(楽茶碗)이 만들어지고, 여기에 다완제작을 생업으로 하는 라쿠야키(楽燒)가 탄생했다. 차회기(茶会記:다회의 기록)에는 「소에키형체의 다완(宗易形ノ茶ワン)」、「지금 구운 다완(今ヤキ茶ワン)」이 텐쇼(天正)14년(1586년)에 등장한 것이 기재되어 있으며, 이것들이 쵸지로(長次郎)가 만든 라쿠차완이라는 생각이 현재 정착되고 있다. 라쿠차완의 시조(祖)라고 불리우는 초대 쵸지로는 원래는 기와를 만드는 장인이었으며, 초기의 「獅子留蓋瓦」(1574년)에 보이는 그 비범한 조소기술은 그것과 대조적인 성격의 다완의 제작을 생각하는 위에 대단히 흥미깊다. 라쿠차완의 특징은 물레를 사용하지 않고 손빚음으로 성형하는 것으로 저화도번조의 연질연유도기(軟質鉛釉陶器)에 속하고, 주체가 되는 것은 쿠로라쿠(黒楽)・아카라쿠(赤楽)로 불리는 2종류의 다완이다. 이채(二彩)・삼채(三彩)의 작품의 예도 있고, 당시 청래(請來)되어 온 중국 남방의 삼채계(三彩系)의 제작법의 영향이 지적되고 있다. 교토의 타마미즈야키(玉水燒)와 카나자와(金沢)의 오히야키(大樋燒)도 라쿠야키의 계보이다. 에도시대(江戸時代)에 들어오면 서화・공예등 다채로운 재능을 보이는 혼아미코에츠(本阿弥光悦, 1558~1637)는 쵸지로의 후계자에 해당되는 죠케이(常慶)로부터 라쿠야키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 풍부한 예술성을 배경으로 한 취미적이며 자유로운 작풍은 다완에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하여 현재에도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

(c)무유야키지메도기(無釉燒締陶器)~비젠(備前)・시가라키(信楽)・이가(伊賀)

항아리・독・스리바치(擂鉢: 질그릇으로 된 양념절구)의 3종류를 중심으로 생산된 중세이후의 야키지메도기(燒締陶器:고온에서 구운 유약이 없는 도기) 는 다도(茶の湯)에 있어서 와비차(侘び茶)의 관심과 함께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시가라키(信楽)와 비젠(備前)은 와모노(和物:일본산)도기로서는 일찍부터 다도에 받아들여졌다. 다회기(茶会記)에도 「시가라키 물항아리(信楽水指)」과「물항아리 비젠(水指ひせん物)」이라는 기재를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일상잡기로서 사용되어진 것을 찾아내어 다도에 사용되어진 경우가 많고, 시가라키(信楽)에서는 오니오케(鬼桶)라고 불리는 민간용 도구가 물항아리로 이용되었다. 비젠(備前)은 미즈사시(水指:물항아리)와 하나이케(花生:꽃병)에 아름다운 것이 많고, 붉은 기를 특색으로 구워진 흙의 분위기와 중후감이 넘치는 호쾌한 조형이 매력이다. 또한 미에켄우에노시(三重県上野市) 및 아야마쵸(阿山町)일대의 이가(伊賀)는 주로 미즈사시(水指)와 하나이케(花生)에 있어서 특히 주목되며, 균일성과는 정반대의 호방한 작풍은 당시 대단히 인기가 좋아 이른바 「파격의 미(美)」를 대표하는 것 중의 하나가 되었다. 특히 유리유약(비드로유)라 불리우는 자연유와 빨갛고 검게 탄 흙의 운치가 매력이다.

(d)조선계시유도기(朝鮮系施釉陶器)~카라츠(唐津)

카라츠야키(唐津燒)의 탄생은 텐쇼(天正)20년(1592년)명(銘)이 있는 항아리와 각지에서의 발굴조사등으로 텐쇼연간(天正年間, 1573~92)에 시작되었다고 추정되며, 분록쿠・케쵸연간(文禄・慶長年間, 1592〜1614) 경에 한반도에서 사가켄(佐賀県)・나가사키켄 (長崎県)일대의 히젠(肥前)지방에 이주되어진 도공에 의해 그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키시타케(岸岳,鬼子岳) 산록의 여러 가마가 초기의 가마이며, 그 곳에서는 오름가마라는 대규모의 번조가마가 도입되었다. 케쵸연간(慶長年間, 1596~1614)중반경이 되자, 열효율이 좋은 조선계연방식등요 (朝鮮系連房式登窯)를 도입하는 것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종래 일본에는 없었던 이 새로운 가마 구조는 미노(美濃)를 시작해 전국으로 확대되어 갔다. 연방식등요에 의한 대량생산체제를 배경으로 다채로운 제품을 생산하여 전국으로 유통하게 됨으로써 카라츠(唐津)는 새로운 시유도기의 생산지로서 일약 유명하게 되었다. 그 작풍은 한반도와 미노(美濃)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었고 차도(茶陶)에서는 고려다완의 모방품과 물항아리・꽃병・요리그릇등에 아름다운 것이 많으며, 또한 기종의 경우 일반 음식기의 전국 시장 점유율은 미노(美濃)를 넘어서게 되었다. 특히 철화로 밑그름을 그리고, 장석유(長石釉)를 입힌 에카라츠(絵唐津)는 대표적인 것이다. 타날문 (打捺文)기법, 발로 차는 물레의 사용, 상감기법등 한반도에서 전해 온 기술을 구사하고 있다. 서일본에서는 뒤에 「카라츠모노(唐津物)」가 도자기의 대명사까지 되었다.

카라츠 이외에도 타카토리(후쿠오카켄)[ 高取,(福岡県)]・사쯔마(카고시마켄) [薩摩, (鹿児島県)] ・야츠시로(쿠마모토켄)[八代,(熊本県)]・우에노(후쿠오카켄)[上野,(福岡県)]・하기(야마구치켄)[萩,(山口県)]・인베(오카야마켄)[伊部,(岡山県)]등, 서일본 각지에서 조선계시유도기를 생산하는 가마가 축조되어 일본의 요업(窯業)을 크게 발전시키게 되었다.

(2)에도(江戸)시대의 도기~쿄야키(京燒)

케쵸(慶長)말년부터 겐나(元和)연간(1615~23)에 걸쳐서 교토에서는 라쿠야키(楽燒)와 더불어 아와타구치야키(粟田口燒)와 키요미즈야키(清水燒) 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쇼호(正保)4년(1647)경, 노노무라닌세(野々村仁清) (生没年不詳)에 의해 오무로닌나지몬젠(御室仁和寺門前)에 오무로가마(御室窯)가 축조하고, 메레키(明暦)2년(1656)경부터 이로에도기(色繪陶器)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에도시대 도기의 새로운 개막이었다. 도기에 우와에즈케(上絵付:유약위에 안료로 그림을 그려 번조하는 것)를 하는 시도는 그때 당시 이미 히젠(肥前)에서 시작되었던 이로에자기(色繪磁器)에 착상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 이미 수입하고 있었던 코우치(交趾)계통의 이로유(色釉)기술의 영향도 생각할 수 있다. 이로에(色繪)를 도기에 칠하는 기법은 중국에서도 예를 보지 못하는 것으로 닌세(仁清)의 독창성은 주목할 만하다.

카나모리소와(金森宗和, 1584~1656)의 비호 아래 닌세(仁清)는 완벽할 정도의 창조력과 섬세치밀한 이로에기법(色繪技法)을 배경으로 왕조취미적인 우아하고 화려한 작풍을 완성하고 궁정을 중심으로 인기가 있었다. 닌나지(仁和寺)와 본명인 세에몬(清右衛門)에 유래하는 「닌세(仁清)」의 명(名)을 자신의 작품에 날인한 것은 도공의 자기주장의 하나로서 주목된다. 제자인 오가타켄잔(尾形乾山, 1663~1743)은 겐록쿠(元禄)12년 (1699)에 교토의 북쪽에 있는 나루타키 이즈미타니(鳴滝 泉谷)에 가마를 열고, 이 땅이 교토의 북서방위에 있다는 것에서 「켄잔(乾山)」으로 칭했다. 백토분장과 유카이로에(釉下色繪:유약밑에 안료로 그림을 그려 번조하는 것)등 독자의 기법에 의해 회화성을 의식한 작풍을 만들어 냈지만, 거기에는 형이자 림파(琳派)를 대표하는 대화가・오가타코린(尾形光琳, 1658~1716)의 적지않은 영향이 있었다. 켄잔(乾山)의 도기에 코린(光琳)가 그림을 그린 양자의 합작도 많이 남아 있다. 켄잔은 닌세를 모방하여 자신의 이름을 도기에 독자의 서체로 묵서(墨書)하고, 그것이 일종의 브랜드적 가치를 부여했다. 켄잔은 닌세로부터 전수받은 도법(陶法)을 『陶工必用』에 정리하고, 후의 교야키(京燒)에 있어서 일종의 지침서가 되었다. 바쿠마츠(幕末)에는 교토에서 처음으로 자기를 구운 오쿠다에센(奥田頴川, 1753~1811), 그 문하에서 중국청시대의 도서(陶書)『陶説』에 의해 도자기 제작을 시작한 문인・아오키모쿠베(青木木米, 1767~1833), 폭넓은 작풍의 닌아미도하치(仁阿弥道八, 1783~1855), 킨란테(金襴手)와 코우치(交趾), 소메즈케(染付)등 중국도자의 디자인을 차그릇에 도입한 에라쿠호젠 (永楽保全, 1795~1854)등의 유명한 도공이 배출되고, 연면(連綿)히 교야키(京燒)의 전통이 이어져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3. 자기

자기(磁器)의 시작

일본의 경우 자기의 창시에 대해서는 1970년대부터의 고고학적 성과에 의하면, 카라츠(唐津)의 도기가마에서 있었다는 생각이 유력하고 그 연대는 1610년대이다. 칸에(寛永)14년(1637), 자기의 상품적 가치에 주목한 나베시마항(鍋島藩)의 개입에 의한 아리타(有田)의 가마공방의 정리・통합이후 자기중심의 생산으로 전환하고, 나베시마항(鍋島藩)의 적극적인 보호장려책의 아래 아리타의 자기생산은 급속하게 성장했다. 초창기의 자기는 기술적으로는 한반도의 영향이 지적되지만, 당시 중국으로부터 대량으로 수입하고 있었던 명시대 말기의 민요계자기의 영향도 짙어 꽤 빠른 단계부터 청화백자도 번조되기 시작했다. 아리타에서 초기(1640년대까지)에 구워진 자기는 일반적으로 쇼키이만리(初期伊万里) 라고 부르며, 소박하고도 자유로운 힘 있는 작풍은 평가가 높다. 이마리(야키)(燒)의 명칭은 아리타 일대에서 만들어진 자기가 중심으로 이마리쯔(항구)[伊万里津(港)]에서 각지로 출하된 것에 유래한다. 그러나 최근 몇년 「히젠자기(肥前磁器)」라는 생산지 중시의 명칭이 제창되고 있으며, 또한 가마터와 소비지유적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한 구체적인 생산・유통상황의 해명도 진전되고 있다.

이로에(色繪)의 탄생

당초 중국의 청화백자를 지향했던 아리타의 자기는 칸에(寛永)말부터 쇼호(正保)초에 걸친 1640년대가 되면 이로에(色繪)자기의 번조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로에의 시작에 대해서는 아직 불명한 것이 많지만, 쇼호(正保)4년(1647) 당시 일본에 있었던 중국인으로부터 그 기술을 습득했다고 하는 것이 사카이다카키에몽케(酒井田柿右衛門家)의 고문서『覚』에서 엿볼 수 있다. 또한 당시 중국으로부터 대량으로 수입된 경덕진민요의 난킹아카에(南京赤絵)와, 장주요(漳州窯)의 이른바 고스아카에(呉須赤絵)의 영향등도 간과할 수 없다. 이로에 탄생으로 인해 아리타에서는 코쿠타니양식(古九谷様式)・카키에몽양식(柿右衛門様式)・코이마리양식(古伊万里様式)・나베시마양식(鍋島様式)이라는 호화현란(豪華絢爛)한 이로에자기의 융성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1970년대이후의 가마터 ・소비지유적의 발굴조사의 성과에 의해 코쿠타니양식(古九谷様式)의 제품도 아리타에서 생산되었다는 설이 유력하게 되었고 정교하고 치밀한 고고학적 편년이 행해지고 있다.

(1)코쿠타니양식(古九谷様式)

코쿠타니(古九谷)라는 이름의 유래는 그것이 종래 다이쇼지항(大聖寺藩)의 코쿠타니가마(이시카와켄)[九谷窯,(石川県)]에서 생산되었다고 생각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몇년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얀베다가마(山辺田窯)에서 코쿠타니의 이로에초벌구이 도편이 그리고, 이로에를 전문으로 행한 공방터가 발견되었으며, 아카에쵸(赤絵町)유적에서는 코쿠타니의 도편이 출토하고 있으며, 이것들이 1640년부터 50년대에 비정되기 때문에 코쿠타니는 히젠(肥前)・아리타(有田)의 초기이로에자기라는 생각이 현재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단계의 백자태토는 아직 그다지 정련(精錬)되지 않았지만, 대담하며 호쾌한 조형과 참신한 그림은 그것을 보충하기에 충분한 것이며, 연회에 사용한 그릇으로서 당시 유행했던 큰접시의 명품을 많이 만들어 냈다. 그 무늬는 『御ひいながた』 [칸분(寛文)7년(1667) 간행]에 그려진 코소데(小袖)도안(圖案)과 명시대말의 『八種画譜』의 한화(漢畵)모티프등 같은시대의 유행디자인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으며, 그 중에서도 마름모꼴과 거북이등을 본뜬 육각형무늬등 기하학무늬를 정교하게 이용한 감각은 참신하면서 현대적이기까지 하다. 게다가 코쿠타니(古九谷)의 큰 특징의 하나는 1점의 그릇에 같은 디자인이 없는 것이다. 이 한정품적 가치는 국내의 부유계층의 수용를 충분히 만족시켰을 것이다. 근년 동남아시아에서 코쿠타니의 출토 예도 보고되고 있으며, 그 유통에 대해서는 재검토의 여지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국내용으로서 생산된 것이다. 또한 이시카와켄(石川県)의 코쿠타니가마에서도 메이레키(明暦)원년(1655년)에 이미 자기생산이 이루어진 것이 발굴조사에 의해 확인 되었으며, 전세(傳世)되어온 코쿠타니와의 관계는 거듭 검토가 필요하다.

(2)카키에몽양식(柿右衛門様式)

카키에몽양식의 이름은 일본의 이로에자기 발전에 공헌한 초대 사카이다카키에몽(酒井田柿右衛門, ?~1666)에 유래하지만, 일반적으로 아리타에서 수출용으로 만들어진 고품질의 이로에자기의 한 무리를 가르킨다.

이로에의 탄생・발전에 따라 종래의 백자의 태토가 개선되어 니고시데(濁手)로 불리우는 유백색의 독자적인 백자피부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그 시기는 근년의 고고학적 발굴의 성과에 의하면, 엔뽀(延宝)연간(1673~80)의 1670년대경으로 생각된다. 니고시데(濁手)의 백자피부를 살리면서 밝은 색조의 아카에(赤繪)에 의한 화훼문과 동물문이 섬세하면서 우아한 필치로 정성스럽게 그려졌다. 거기에 이른바 카키에몽양식(柿右衛門様式)의 완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주로 물레로 성형 한 후 다시 형압성형된 얇은 자기태토를 이용해 일그러짐없이 샤프하고 섬세한 조형을 만들어냈다. 아카에쵸(赤絵町)유적의 발굴등에서 카키에몽양식 (柿右衛門様式)의 자기는 코쿠타니양식을 기초로해서 전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카키에몽양식은 청의 강희(康熙)연간 (1662~1722)의 오채(五彩)등 중국・경덕진요의 이로에자기를 모범으로 하여 처음부터 그것들의 대체품으로서 국외에서 수요되었기 때문에 주로 국내대상의 코쿠타니양식의 제품과는 크게 분위기가 다르다. 17세기후반부터는 형압(型壓)성형의 인형도 만들어지게 되고, 아카에쵸(赤絵町)유적에서는 그 토제품의 형틀이 출토하고 있다.

네덜란드동인도회사를 통해 유럽으로 건너간 카키에몽양식의 제품은 1710년경에 유럽에서 최초로 자기 번조에 성공한 독일의 마이센가마를 시작해, 프랑스의 세이블가마, 영국의 첼시가마등 각지에서 그 모제품이 만들어졌다.

(3)코이마리양식(古伊万里様式)

에도시대의 히젠자기(肥前磁器)중에서도 1640년대까지의 청화백자를 중심으로 한 자기를 쇼키이마리(初期伊万里)라고 부르고 있는 것에 비해 1690년경부터 생산이 시작된 중국・경덕진요의 오채(五彩)와 킹란데(金襴手)을 지향한 이로에자기를 코이마리양식(古伊万里様式)으로 부르고 있다.

만지(万治)2년(1659) 수출이 정지되었던 중국의 경덕진을 대신해 네덜란드동인도회사로부터 동남아시아와 유럽을 대상으로 하는 수출자기의 대량주문을 받은 아리타에서는 명시대 후기의 오채(五彩)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고 있었던 후기바로크 취미도 도입하면서 장식성을 지나칠 정도로 추구한 소메니시키데(染錦手)를 완성시켜 수출자기의 중심이 되었다. 겐록쿠(元禄)연간(1688~1704)에는 경덕진요의 가정(嘉靖)연간 (1522~66)과 만력(万暦)연간(1573~1619)의 킹란데(金襴手)를 모방한 소메니시키데(染錦手)에 금채를 칠한 이른바 킹란데양식도 등장하며, 이후 카키에몽양식의 대체품으로 내수를 채움과 동시에 수출자기의 인기도자기로서 유럽의 수요도 크게 만족시켰다.

(4)나베시마(鍋島)양식

자기생산의 확립・전개에 의해 그 상품적 가치가 높아짐에 따라 아리타를 항내(藩内)에 영유한 나베시마항(鍋島藩)은 자기생산체제의 관리를 강화하고, 쇼호(正保)4년(1647)에는 아리타사라야마다이칸(有田皿山代官)을 설치했다. 나베시마항은 항(藩)의 생활용품을 시작해 장군가(将軍家)에의 헌상용과 각 다이묘・쿠게(公家)등의 증답용으로서 특히 양질의 자기를 만드는 목적으로 칸에(寛永)연간(1624~44)경 아리타의 이와야가와치(岩谷川内)에 일종의 관요로도 불리는 항직영의 가마・항요(藩窯)를 축조했다. 여기에 나베시마양식의 자기가 탄생한다. 항요는 칸분(寛文)연간(1661~73)에 아리타의 난가와라(南川原)로 옮겨지고, 또한 엔뽀(延宝)3년(1675)에는 이마리의 오카와치야마(大川内山)로 옮겼다고 한다. 엄격한 규격과 제품관리 거기에 당시의 경덕진가마를 모방한 완전분업체재 아래 최고의 장인기술에 의해 완벽하기까지한 양식의 아름다움을 겸비한 제품이 만들어지고, 겐록쿠(元禄)연간(1688~1703)경의 오카와치야마항요 (大川内山藩窯)때에 최성기를 맞이했다. 특히 이로나베시마(色鍋島)라고 불리는 이로에자기는 나베시마양식을 대표하는 것으로 세련된 일본풍의 디자인과 숙련된 기술은 정말로 관요적인 풍격을 갖추고 있다. 모쿠하이가타(木杯形)라고 불리는 굽이 높고 내면이 깊은 접시가 대표적이며, 샤쿠자라(尺皿:약30㎝의 접시)・나나슨자라(七寸皿:약21㎝)・고슨자라(五寸皿:약15㎝)・산슨자라 (三寸皿:약9㎝) 로 엄격하게 규격화되고 있었다.

자기의 확대

아리타에서는 1640년부터 50년대에 걸쳐서 종래의 한반도 기술로부터 탈거하고 중국의 요업기술을 기초로 한 요업체재로 대규모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 배경에는 중국의 명에서 청으로의 왕조교대를 동반한 내란에 의해 유출한 화남(華南)의 요업기술의 영향이 지적되고 있다. 1661년의 천계령(遷界令)에 의해 경덕진요의 자기의 수출이 완전히 멈췄기 때문에 국내외의 자기수요를 짊어지게 됨으로써 경덕진 대신에 아리타가 클로즈업 되게 된 것이다. 중국의 최신 자기번조기술을 도입하고 기술혁신을 행한 아리타의 요업은 1659년에 네덜란드동인도회사로부터 대량의 주문을 받게 됨으로써, 경덕진가마자기에 필적하는 수준의 제품을 만들어내기까지 이르렀다. 여기에 히젠자기의 해외대수출시대가 막을 열게 되었다. 1650년〜60년대부터 중국 명말의 부요데(芙蓉手)모방품의 청화백자대접시가 수출용으로서 대량으로 만들어졌다. 앞의 기술혁신 중에서 태어난 이로에자기도 유럽을 중심으로 해외로 수출하여 인기를 모으게 되었다.

1684년의 천계령(遷界令)의 해제에 의해 중국의 자기가 수출을 재개하자 히젠자기의 수요는 극단히 줄어들고,오히려 국내시장을 겨냥한 청화백자를 중심으로 한 식기등의 일상제품으로 전환을 도모했다. 제품의 저가격화, 기술의 간편화와 함께 획일화가 진전되었지만, 일반서민층까지 자기가 보급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1610년대에 아리타에서 시작된 자기생산은 17세기 단계에서는 아리타 이외에 쿠타니요(이사카와켄) [九谷窯(石川県)]와 히메타니요(히로시마켄)[姫谷窯(広島県)]가 알려질 뿐이다. 이것은 자기의 상품적가치에 주목한 나베시마항(鍋島藩)이 그 기술이 다른 항(藩)에 유출되는 것을 극단적으로 경계하고 엄중히 관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술의 유출을 완전히 억제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18세기가 되면 큐슈(九州)각지에서 자기의 생산이 시작되었다. 또한 텐메(天明)연간(1781〜88)경에는 교토에서도 자기번조가 시작된다. 그리고, 18세기후반에는 토베야키(에히매켄)[砥部燒,(愛媛県)], 스에야키(후쿠오카켄)[須恵燒,(福岡県)],코미네야키(미야자키켄)[小峰燒(宮崎県)],이토야키(시마네켄)[意東燒(島根県)] 등 각지에서 자기를 생산하는 가마가 번성했다. 게다가 분카(文化)연간(1804~18)에는 세토에서도 청화백자의 번조가 성공하고 그 후 비약적으로 생산양을 늘려 자기발상의 지역인 아리타를 능가하여 동일본에서는 세토모노(瀬戸物)가 도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주임학예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