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의 역사

중국도자의 시점

데가와테츠로

머리말

중국도자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또 높게 평가되어 왔다. 그러면서도 중국도자사는 아직 완전히는 해명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다수의 가마가 조사되었지만, 조사가 완료하고 완전한 보고서가 간행된 가마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리고, 고고학적 발굴에 의한 새로운 사실로 인해서 항상 고쳐 쓰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중국도자의 매력을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은 다수 알려져 있다. 각 시대의 기법적, 예술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작품 특히 귀족취미, 궁정취미가 반영된 것과 최고급의 무역도자등이다. 그 외에 20세기에 들어와서 발굴에 의해 알려지게 된 신석기시대부터 송시대의 미적가치를 가진 도자기도 포함해서 통사적(通史的)으로 내외(内外) 미술관, 박물관에서 감상 할 수 있게 되었다.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이 뒤로 대충 말하자면 황하(黄河)의 중・상유역, 황하하유역, 장강(黄河) 이남의 강남지역의 3지역에서 독자적인 스타일의 토기가 만들어지고, 또한 도자기 제작에 사용된 가마도 발견되고 있다.

우선, 황하중・상유역에서는 B.C.4500년에 노관태문화(섬서성)[老官台文化, (陝西省)]가 탄생하고, 북수령유적(北首嶺遺跡)등에서는 회도(灰陶)가 출토하고 있다. B.C.4000년경부터의 반파유적(섬서성)[半坡遺跡, (陝西省)]이나 B.C.3300년경부터의 묘저구유적(하남성)[廟底溝遺跡, (河南省)]등의 앙소문화(仰韶文化)가 꽃핀다. 이 시기에는 태토에 검은안료로 무늬를 그리는 채도(彩陶)가 출현한다. B.C.3300년경에는 빨간안료가 첨가되어 화려한 것으로 변해간다. 중국서부의 감숙성(甘粛省) 이나 청해성(青海省)에서도 채도(彩陶)가 번조되어, 감숙양사오문화(甘粛仰韶 文化) 또는 마가요문화(馬家窯文化)[B.C.3000년경〜] 라고 부른다. 그 뒤, 반산문화(半山文化)[B.C.2600년경〜], 마창문화 (馬廠文化)[B.C.2200년경〜] 등이 전개하고, 감숙성(甘粛省)에서는 제가문화 (斉家文化), 신점문화(辛店文化) 등 전국시대(戦国時代)경까지 오랫동안 채도문화 (彩陶文化)가 계속되었다.

한편, 황하하유역의 산동성(山東省)부터 강소성(江蘇省)에 걸쳐서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B.C.4500년〜B.C.2400년]가 전개되었다. 전기에는 홍도(紅陶)가 중심이고 중기에는 채도(彩陶)가 구워졌으며, 후기에는 물레와 가마를 사용한 환원염번조에 의한 회도(灰陶)와 흑도(黒陶), 백도(白陶)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어지는 용산문화 (龍山文化) [B.C.2400년〜B.C.2000년] 에서는 정교하게 성형된 계란껍질과 같은 얇은 흑도(黒陶)가 유명하다. B.C.5000년경부터는 절강성(浙江省)의 하모도문화(河姆渡文化)가 일어나고, 홍도(紅陶), 회도(灰陶)중심의 마가빈문화(馬家濱文化) [B.C.3600 년〜B.C. 2700년), 흑도(黒陶)중심의 양저문화(良渚文化) [B.C.2750년경〜 B.C.1890 년경]가 절강성(浙江省)북부부터 강소성(江蘇省)에 걸쳐서 전개된다. 사천성(四川省)부터 호북성(湖北省)에 걸쳐서도 허무두문화 (河姆渡文化) 를 이어받아 홍도(紅陶)의 대계문화(大渓文化), 흑도(黒陶)의 굴가령문화(屈家嶺 文化)[호북성〜하남성]가 계속된다.

하(夏)・상(商)・주(周)・진(秦)・한(漢)시대

B.C.1600년경에 시작한 상(商)[은(殷)]왕조에서는 뛰어난 청동기가 주조되고, 백도(白陶)의 경우에는 청동기를 그림본으로 한 것도 보인다. 시유도(施釉陶)의 번조기술이 생기고 이 회유도(灰釉陶)는 회도(灰陶)의 기형을 계승한 것으로, 원시자기(原始瓷器)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춘추시대(B.C.772년〜B.C.481년)말기부터 전국시대 (B.C.403년〜 B.C.221년)에 걸쳐서는 인문경도(印文硬陶)가 번조되고, 또한 회유도(灰釉陶)에서 청동기를 모방한 것이 많이 보인다.

화북지역(華北地域)에서 전국시대에 시작된 후장(厚葬)의 풍습은 진시황제의 병마용(兵馬俑)에 보이듯이 진대(秦代)[B.C.259년〜B.C.210년], 한대(漢代)[B.C.202 년〜8년・25년〜220년]에 걸쳐서 더욱더 활발하게 되었으며, 명기(明器)로서 회도(灰陶), 가채회도(加彩灰陶)가 대량으로 구워진다. 그것과 함께 고화도에서 번조되는 회유도(灰釉陶)에 비해 저화도(800〜900도)로 번조되는 연유도(鉛釉陶)가 개발된다. 연유도에는 정색제(呈色剤)로 동(銅)을 사용한 녹유(緑釉)와 철(鐵)을 사용한 갈유(褐釉)가 있다. 이 연유도(鉛釉陶)도 명기(明器)로서 사용되었다. 연유도에는 누각(楼閣)과 개, 우물, 항아리등 가지각색의 기형이 있다.

후한시대(後漢時代)가 되면 본격적인 청자가 등장하고, 가마가 절강성북부의 상우(上虞), 영파(寧波), 영가(永嘉)등에서 발견되고 있다. 입이 바로 선 사이호(四耳壺)등이 있으며 이른바 월요청자(越窯青磁)의 시작이다.

삼국(三国)・양진(両晋)・남북조(南北朝)시대

월요청자(越窯青磁)는 삼국시대부터 서진시대(西晋時代)[220년〜317년]에 발전하고 독특한 조형을 만들어냈다. 예를들면, 항아리 위에 누각(楼閣)을 배합하고, 인물이나 동물을 붙인 신정호(神亭壺)와 반구호(盤口壺)에 손잡이를 붙이고, 닭이나 양의 머리를 주구(注口)로 한 천계호(天鶏壺)등이 만들어졌다. 신정호(神亭壺)는 후한시대의 오련관 (五連罐) 에서 발전한 것으로 3세기후반부터 4세기에 걸쳐서 만들어졌다. 천계호(天鶏壺)는 4세기이후 동진(東晋)에서 시작된다. 또한 양이나 사자, 개, 닭장, 개구리형수우(蛙形水盂)등 동물형의 조형도 다수 보인다. 철화(鐵畵)를 칠한 청자 항아리가 강소성(江蘇省) 남경시(南京市) 우화대(雨花台)의 삼국시대 무덤에서 출토하고 있다. 동진(東晋)시대에는 철반문(鉄斑文)을 칠한 것과 흑유(黒釉)의 천계호(天鶏壺)가 번조되었다. 남조(南朝)시대가 되면 불교예술의 영향을 받아 연변문(蓮弁文) 무늬가 유행한다. 남조의 월요(越窯)의 조형인 반구호(盤口壺)등은 그대로 수(隋)에서 당(唐)에 걸쳐서도 볼 수 있다.

한편, 화북(華北)지역에서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国)의 시대로 들어간다.북제시대(北斉時代)[550년〜577년]에 백색의 태토에 투명유약을 입히고 고화도로 번조하는 백자가 구워졌다. 또한 저화도 번조의 연유도(鉛釉陶)도 번조되어 황유(黄釉)에 녹유(緑釉)를 흐르게 하듯 입힌 것이 북제(北斉)의 무덤에서 출토하고 있다. 이것은 나중의 당삼채(唐三彩)로 발전하는 것이라 한다. 이 시대는 포도문, 인동문(忍冬文), 연벽문(連璧文)등이 보이고, 서아시아문화가 작풍(作風)에 영향을 끼친 시기이기도 하다. 이 경향은 수대(隋代) [581년〜618년]에도 계승된다. 하남성(河南省)의 공현요(鞏県窯) 나 하북성 (河北省)의 임성현(臨城県), 내구현(内丘県)의 형주요(邢州窯) 에서는 백자가 번조되었다.

당(唐)시대

당대(618년〜906년)가 되면 문화는 더욱더 국제성을 띠게 되고 새로운 조형도 볼 수 있다. 7세기의 월주요에서는 고월자(古越磁)의 반구호(盤口壺) 등의 조형과 유색(釉色)이 계속되어 번조된 것 같다. 그 산지(産地)도 절강성(浙江省) 북부의 월주요(越州窯)에 한정되지 않고, 절강성 남부부터 복건성(福建省), 강서성(江西省)등에도 보인다. 화북(華北)에서는 요주요 (耀州窯) 에서 흑자(黒磁)와 백유자(白釉磁)가, 형주요(邢州窯)등에서는 백자의 생산이 확대되어 간다. 또한 만당(晩唐)에는 정요(하북성곡양현) [ 定窯, (河北省曲陽県)]가 개설되고, 백자생산 중심으로 되어 간다. 백토로 분장하고 투명유약을 입힌 백유도(白釉陶)는 학벽요(하남성) [鶴壁窯, (河南省)], 밀현요(하남성)[密県窯, (河南省)], 등봉요(하남성)[登封窯,(河南省)]등을 시작으로해서, 하북성(河北省), 산동성(山東省), 안휘성(安徽省), 산서성(山西省), 섬서성(陝西省)으로 확대된다. 이것들 가마에서는 오대(五代)에는 새롭게 백유녹채(白釉緑彩)나 유하철회(釉下鐵繪)가 개발되며, 박지(剝地)기법이 북송에 걸쳐 발전한다.

명기(明器)로서 가채(加彩)의 용(俑)도 다시금 활발하게 제작이 계속되고 있다. 조형적으로 뛰어난 것이 많이 보인다. 연유도(鉛釉陶)에서는 삼채(三彩)가 활발하게 된다. 당삼채(唐三彩)는 대부분이 명기로서 제작되고, 가마는 형주요(邢州窯), 요주요(耀州窯), 공현요(鞏県窯)등에서 발견되고 있다. 초당(初唐)부터 성당(盛唐)에 걸쳐 활발했던 아름다운 귀족문화는 755년의 안녹산・사사명(安禄山・史思明)의 난을 경계로 쇠퇴해간다. 청자에서는 고월자(古越磁)로부터 아주 새로워진 전개가 월주요에 보인다. 8세기후반부터 9세기후반에 걸쳐 옥벽굽대(玉璧高台:해무리굽)의 사발등이 만들어지고, 이 형식은 형주요(邢州窯)등 각지의 가마에서도 볼 수 있다. 육우(陸羽)의 『茶経』(761년경)에는 월주요(절강성자계)[越州窯, (浙江省慈溪)], 정주요(섬서성요주요)[鼎州窯,(陝西省耀州窯)], 무주요(절강성금화) [婺州窯,(浙江省金華)] , 악주요 (호남성상음) [岳州窯, (湖南省湘陰)], 수주요(안휘성회남) [壽州窯,(安徽省淮南)], 홍주요(강서성풍성) [洪州窯,(江西省豊城)]등, 백자에서는 형주요(邢州窯)의 사발을 들 수 있다. 월주요(越州窯)에서는 이 뒤, 법문사지하궁전[法門寺地下宮殿, (874年)] 출토품에서 보이는 것 같은 비색청자(秘色青磁)를 생산한다. 비색(秘色)청자의 생산의 중심은 절강성자계시상림호반(浙江省慈溪市上林湖畔)의 가마이고, 오월왕(呉越王)의 전(銭)씨는 비색(秘色)의 공납용 자기(貢磁)를 대량으로 생산했다.

유하채(釉下彩)에 동(銅)이나 철(鐵)을 이용한 도기(陶器)는 당대(唐代)에 호남성(湖南省)의 장사요(長沙窯)에서 활발히 제작되었다. 또한 코발트를 이용한 남유(藍釉)가 당삼채에 자주 보이고, 게다가 당대의 청화자기가 몇 개 알려져 있다. 강소성(江蘇省)의 양주당성유적지(揚州唐城遺址)에서 출토한 것과 하남성(河南省)의 낙양(洛陽) 출토품 등이 청화의 선구적인 예이다. 본격적인 청화의 등장은 원(元)시대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

송(宋)시대

송시대의 백자의 대표적인 가마로서는 정요(定窯)가 알려져 있고, 만당(晩唐)부터 금(金)에 걸쳐서 활동했다. 가마터는 하북성(河北省)의 곡양현간자촌(曲陽県澗磁村)에 확대되어 있다. 송시대에는 주로 각화(刻花)나 인화(印花)로 무늬를 새긴 상아색의 백자를 생산하고 있었고, 그 외 녹유(緑釉)나 흑유(黒釉), 갈유(褐釉)를 입힌 것도 보인다. 궁정에서 사용하기 위해서 제작된 격조 있는 용무늬나 봉황무늬등이 있다. 정요(定窯)의 자기 태토는 치밀하고 단단하며 백색이다. 그리고, 그릇의 두께는 얇게 만들어졌으며 조형도 세련되고 안정감이 있다. 정요에서는 엎어서 굽는 번조법이 도입되어 생산효율이 높아졌다. 그러나, 구연부는 시유(施釉)되지 않기 때문에 금속의 복륜(覆輪:입술을 금이나 은으로 덮어서 장식한 것)을 하는 것이 많다.

오대에 경덕진(강서성)[景徳鎮,(江西省)]의 양매정(楊梅亭), 황니두(黄泥頭), 호전(湖田)등에서는 청자와 함께 순백의 백자를 번조하고 있다. 청자는 월주요계의 것이다. 백자는 11세기경부터는 유약에 푸른색을 머금는 청백자가 중심이 되어 방대한 양이 번조되었다. 여기서도 12세기경부터 엎어서 굽는 번조기법이 이어졌다. 순백자는 경덕진외에 강서성(江西省)의 길주요(吉州窯)와 남풍요(南豊窯), 복건성의 덕화요(徳化窯), 건요(建窯), 포성요(浦城窯)등 외에 광동성(廣東省), 안휘성(安徽省), 절강성(浙江省)등에서도 번조하여 청백자계통을 구성했다.

요주요(耀州窯)는 당(唐)부터 자주요(磁州窯) 계통의 가마로서 백유도(白釉陶) 나 당삼채(唐三彩)등을 번조했지만, 월주요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청자도 번조하고 있다. 또, 오대(五代)의 요주요청자(耀州窯靑磁)는 유색(釉色), 조형과 함께 뛰어난 것으로 일찍이 동요(東窯)라고 불린적도 있다. 북송(北宋)에는 양각(片切彫り: 공구의 칼날을 눕혀서 무늬의 윤곽을 그리는 방법)으로 무늬를 나타내고, 올리브그린의 유색(釉色)을 한 청자가 만들어졌다. 요주요(耀州窯)의 중심은 섬서성(陝西省)의 동천시황보진 (銅川市黃堡鎭)이며, 여기서도 훌륭한 양각(陽刻)나 압출양각(壓出陽刻)의 사발과 반(盤)이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송대(宋代)에 연료는 장작(薪)에서 석탄으로 바뀌고, 또한 요주요의 작풍을 가진 것이 하남성(河南省)의 임여요(臨汝窯), 보풍요(宝豊窯)등의 여러 가마에서 번조되어 요주요계통을 이루었다. 월주요의 비색청자(秘色靑磁)의 영향을 받은 오대(五代)의 요주요는 더욱더 여요(汝窯)로 이어지는 청자의 이상인 유색(釉色)의 추구의 계보가 있다. 여요는 하남성보풍현청량사(河南省宝豊県清涼寺)가 그 가마터라고 일컫어지고 있다. 여기에서는 여요뿐만 아니라 균요(鈞窯)계통이나 요주요계통의 것도 동시에 번조되고 있었다. 여요의 제품은 섬세한 빙열이 있고, 태토에 바늘과 같은 작은 지주(支柱)로 떠받쳐 번조한 정교한 것으로 전세품(伝世品)는 대단히 적다. 1127년 여진족에 쫓긴 송의 왕실은 수도를 임여(항주) [臨安,(杭州)]로 옮기고, 남송관요(南宋官窯)를 연다. 문헌에서는 수내사요(修內司窯)나 교단하요(郊壇下窯)등이 남송관요로 설치되어 있다. 현재 교단하요(항주시조귀산)[ 郊壇下窯,(杭州市鳥龜山)]의 발굴보고가 나와 있고, 최근 몇년에는 수내사요(修內司窯)라 일컫는 가마의 발굴조사가 봉황산(鳳凰山)의 노호동(老虎洞)가마터에서 행해졌다. 남송관요(南宋官窯)의 것은 철분을 많이 포함한 흑색의 태토가 특징이며 유층(釉層)도 꽤 뚜껍다. 남송관요타입의 것은 용천요(龍泉窯)나 월주요(자계현팽동요) [越州窯,(慈溪県彭東窯)] 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용천요는 북송시대중기까지는 같은 절강성내의 월주요, 구요(甌窯), 무주요(婺州窯)의 여러가마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 기형, 유색의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가마를 연 것은 서진시대(西晋時代)에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도 하며 월주요계통의 가마의 하나였다. 남송시대에 용천요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대요(大窯), 금촌(金村), 계구(渓口), 안복(安福), 산두(山頭), 대백안(大白岸), 상엄아(上厳児), 안인구(安仁口)등에 수백개의 가마가 흩어져 있는것으로 알려졌다. 계구요(渓口窯)등에서는 남송관요 (南宋官窯)를 모방한 흑태청자 (黒胎青磁) 의 조형이 보인다. 남송에서 원(元)에 걸쳐서 뛰어나 용천가마가 일본에 다수 전세(伝世)하고 있고, 출토 예도 대단히 많다. 1323년 한국 신안 앞바다 침몰 선박에서 1만점이 넘는 용천요청자(龍泉窯青磁)가 인양되었다. 또한 1991년에 사천성(四川省) 수녕현(遂寧縣) 의 동굴창고(窖蔵)에서 남송말의 청백자와 함께 대량의 용천요청자가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남송후기의 용천요청자는 유약이 2층에서 3층으로 두껍게 입힌 분청색(粉青色)의 뛰어난 것이 많이 있고, 일본에서는 이 유색(釉色)을 침청자 (砧青磁:키누타세 지)라고도 칭하고 있다.

천목이라고 불리는 흑유(黒釉)의 다완이 송시대에 각지에서 번조된다. 흑유는 후한시대(後漢時代)에 탄생하고, 덕청요(절강성)[徳清窯,(浙江省)] 등의 고월자(古越磁)를 번조한 가마에도 보이지만, 정요(定窯)의 흑유자(黒釉磁)등 훌륭한 다완(茶碗)이 번조되는 것은 북송(北宋)시대가 되면서이다. 자주요(磁州窯), 요주요(耀州窯), 길주요(吉州窯), 건요(建窯)를 시작해 중국각지의 가마에서 흑유 다완이 번조되었다. 남송시대에는 건요(복건성건양현수길진)[建窯,(福建省建陽県水吉鎮)]에서 흑유완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화목천목(토호잔)[禾目天目,(兎毫盞)], 유적천목(적주잔) [油滴天目,(滴珠盞)]이나 요변천목(曜変天目)등이 높게 평가받고 있다. 또한 길주요(강서성 길안시 영화진)[吉州窯,(江西省吉安市永和鎮)]에서는 종이모형으로 무늬를 나타내거나 나뭇잎을 구워 붙인 천목과, 유조(釉調)가 별갑(鼈甲)과 닮은 대피천목(玳皮天目) [(鼈盞,玳皮盞)]이 생겼났다. 자주요(磁州窯)에서는 백색의 복륜천목(白覆輪天目)등도 만들어졌다.

자주요는 화북(華北)의 민요(民窯)를 대표하는 것으로 그 특징적인 제품은 백토분장을 한 위에 박지(剝地)기법으로 규격화되지 않은 자유로운 무늬를 나타낸 것이다. 또한 백토분장 한 위에 철안료를 발라서 무늬를 박지기법 한 것에 뛰어난 작품의 예가 있다. 이 박지기법으로 대표되는 자주요(磁州窯) 가마는 하북성남부(河北省南部)의 자현(磁県)이 중심이다. 이 외에 자주요계통의 가마는 하남성(河南省)을 시작해, 하북성(河北省), 산서성(山西省), 산동성(山東省), 섬서성(陝西省)으로 확대되어 간다. 송대(宋代)에 화북(華北)에서는 이 자주요계통 외에 요주요(耀州窯)계통, 균요(鈞窯)계통, 정요(定窯)계통이 각각 서로 겹치면서 수요(需要)에 응해 활발한 생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금(金)시대 13세기부터 원(元)시대에 걸쳐서 하북성(河北省)의 자주요, 하남성(河南省)의 학벽요(鶴壁窯), 등봉요(登封窯), 우현(禹県)의 배촌요(扒村窯), 산동성(山東省)의 치박요 (淄博窯), 산서성(山西省)의 장치요(長治窯)등 자주요계통을 구성하는 몇 개의 가마에서 적색과 녹색으로 우와에(上繪:유약을 발라 구운 위에 그린 무늬)를 한 아카에[赤繪,(紅緑彩)]가 생산되게 된다. 원(元)시대에는 경덕진에서도 자주요풍의 (磁州窯風)의 아카에(赤繪)가 생산된다.

청화(青畵)와 오채자기(五彩磁器)

당(唐), 오대(五代), 북송(北宋)에는 청화의 선구적인 예가 몇가지 보이지만, 원(元)시대가 되면서 청화의 출토자료나 기년명(紀年銘)자료, 유품(遺品)이 많아지고 양식전개를 찾아 보는 것이 가능하다. 백자에 푸르고 선명하게 그리고 치밀하게 그려진 청화는 전혀 새로운 회화적 표현을 가능하게 했다. 남송시대부터 원시대에 걸쳐서 경덕진에서는 양각(陽刻) 및 압출양각 (壓出陽刻)에 의한 무늬 표현이 주류였다. 그리고, 청백자 각화에 홍유(紅釉)가 표현된 것도 보이게 되고, 청백자에 구슬장식을 도톰하게 하여 입체감을 나타내는 표현도 나타난다. 또한 구슬장식과 같은 구슬 장식 디자인을 동화(銅畵)에 의한 표현등이 시도되었다. 기법적으로 무늬를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관심이 쏠렸다. 그리고, 산화코발트에 의한 유하채(釉下彩)의 기법인 청화가 정착하자 가지각색의 무늬가 그려지게 된다. 붓에 의해 그림 그리기가 자유롭게 되자 그림의 제재(題材)는 단번에 확대되어 간다. 치밀한 붓놀림과 농담(濃淡)있는 청색에 의해 표현력은 높아지고 그때까지의 도자기 장식에는 볼 수 없었던 사실적인 것이 나타난다. 또한 청화의 기법이 성립하는 것과 시기를 같이해서 대형의 반(盤)과 항아리가 제작된다. 따라서, 무늬를 그리는 표면적(表面積)이 필연적으로 넓어지게 된다. 선명한 청색의 그림 그리기에 관심이 향해지고, 이미 도자기의 하얀 표면은 무늬를 위한 배경에 지나지 않는 정도가 되었다. 기형(器形)의 특징으로서는 송(宋)시대의 기형을 답습한 것에 옥호춘(玉壺春) 과 매병(梅瓶)이 있고, 원(元)시대 이후에 나타나는 기형으로서 고족배(高 足杯), 승모호(僧帽壺)등이 있다.

주요무늬로서 용문, 봉황문 외에 기린이나 원앙, 물고기, 벌레 등의 동물과 모란, 참외, 파초, 연꽃등의 식물이 그려진다. 주요무늬의 주위에는 파도문, 여의두문, 라마식연변문, 보상화당초문, 모란당초문, 잡보문(雑宝文)등이 배치되고 있다.

강서성구강시(江西省九江市)의 연우(延祐)6년(1319)무덤 출토의 청화탑식공개호(青畵塔式共蓋壺)에서는 청백자의 유하채(釉下彩)에 여의두문, 모란문, 연변문이 그려져 있다. 또한 후지원(後至元)4년에(1338) 청화유리홍사신문공개호(青畵釉裏紅四神文共蓋壺), 청화유리홍누각 (青畵釉裏紅楼閣) 등도 청백자에 유하채(釉下彩)가 그려진 것도 있다. 이러한 작품의 뒤에 등장하는 것이 지정(至正)11년(1351)명(銘)이 있는 런던대학데이빗재단의 청화용문상이병(青畵龍文象耳瓶)이다. 이것은 완성된 당당한 양식을 하고 있다. 이른바 지정(至正)양식이다. 따라서, 이 무렵에는 청백자에서 청화자기로 급격한 발전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 무늬 표현을 위해 가지각색의 기법이 동시평행해서 존재하였다고 생각된다. 청화기법의 완성에 의해 보다 치밀한 무늬구성이 가능하게 되고, 또한 농담있는 그림 그리기의 고안에 의해 표현력은 한층 높아졌다. 코발트안료는 이슬람권에서 유입한 것이고, 다단(多段)에 무늬대를 겹치게 하는 구성이나 기형에는 이슬람의 금속기의 영향이 보이는 등, 원(元)시대의 경덕진의 경우 이슬람으로부터의 영향 아래에 본류(本流)로서 청화가 탄생했다. 경덕진의 원대(元代) 자기가마터는 교외의 호전요(湖田窯)와 시내지역에 집중하고 있다. 호전요는 청백자를 생산한 광대한 가마이다. 여기에서는 구슬모양 장식이 있는 청백자의 항아리편(壺片)과 함께 이스탄불의 토프카프궁전등에 전세(伝世)되고 있는 원시대 청화의 대반(大盤)등의 무늬와 일치하는 청화자기편(青畵磁器片)이 출토하고 있다.

원왕조(元王朝)에 의한 장작원(將作院)의 부량자국(浮梁磁局)의 설치는 지원(至元)15년(1278)으로 되어있다. 장작원(將作院)에는 부량자국(浮梁磁局) 외에 화국(畵局)도 설치되어 여기서 청화의 밑그림이 그려졌다고 한다. 이슬람계 기술자를 포함해 상당수의 장인이 이 화국(畵局)에 속하고, 이 일은 토프카프궁전등에 소장되어 있는 청화자기의 기하학적인 무늬 구성등에서도 반영되고 있다.

중국 국내에서는 하북성(河北省)의 보정시(保定市)나 강서성(江西省)의 고안현(高安県)등의 동굴창고에서 원(元)의 청화나 동화(銅畵)가 출토되고 있다. 또한 원청화는 무역도자로서 유통하고 세계각지에서 수장 내지 출토하고 있다. 예를들면 터키의 토프카프궁전, 이란의 아르데빌묘등에 소장되어 있는 것 외에 인도의 궁전터나 연안부 각지역, 중근동(中近東)의 다마스카스, 호르무즈, 에집트의 후스탓트, 게다가 일본의 후쿠이(福井)나 오키나와(沖縄)에서도 출토하고 있다. 또한, 동남아시아에서는 지정양식(至正様式)의 것과는 다른 타입의 원(元)의 청화가 다수 출토하고 있다. 그러나, 원시대에 황제용으로서 제작되면서도 고궁(故宮)의 궁정컬렉션에는 거의 수집되어 있지 않고, 중국 국내보다도 국외에 있어서 뛰어난 원청화자기(元青畵磁器)가 전세(伝世)하고 있다. 이것은 원청화의 무역도자로서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음과 동시에 원청화에 대한 명청시대(明清時代)의 평가를 반영하고 있다.

한편, 우와에(上繪) 기법은 금대(金代)의 자주요의 아카에(홍녹채)[赤繪(紅緑彩)] 에 보인다. 아카에(赤繪)는 적, 녹, 황색으로 재빠른 붓놀림으로 간략하게 그림을 그린 것으로, 금(金)의 연호의 묵서명(墨書銘) [태화원년(泰和元年)1201년]이 있는 사발등이 알려져 있다. 백유(白釉) 위에 녹유(緑釉)나 황유(黄釉)등의 삼채유(三彩釉)에 빨강이 첨가된 그림이다. 원시대에는 이 송아카에(宋赤繪)와 닮은 이로에자기(色繪磁器)가 경덕진에서 생산되고 있었다. 경덕진에서 출토한 도편(陶片)을 보는 한 관요의 엄격함은 보이지 않고 자주요(磁州窯)의 작풍을 남기고 있다. 화북의 자주요의 작풍이 강서성(江西省)의 경덕진에 전해진 것이다. 청화의 지정양식(至正様式)의 완성과 함께 청화는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우와에(上繪)기법은 그다지 발달을 보지 못했다.

현재, 경덕진시의 주산(珠山)에서 어기창터(御器廠跡)의 발굴이 경덕진시도자고고연구소(景徳鎮市陶瓷考古研究所)에 의해 행해지고, 그 발굴성과는 『皇帝の磁器展』(1995년)등에도 소개되고 있다. 어기창(御器廠)은 명대 초기에 설치된 관요(官窯)이다. 여기에 중관(中官)의 독조관(督造官)등이 파견되어 관요의 번조가 이루어져왔다. 어기창(御器廠)의 설치에 대해서는 홍무(洪武)2년(1369)(『景徳鎮陶録』) , 홍무(洪武)35년 (1402) (『江西大志』), 선덕원년(宣徳元年)(1426)등 여러설이 있으며, 사서(史書) 의 기술(記述)에서도 일치하지 않는다.

홍무제(洪武帝)는 해금정책(海禁政策)을 취하여 조공무역(朝貢貿易)만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슬람권으로부터 코발트 유입이 끊기자 청화자기의 양식을 모방한 동화자기(釉裏紅磁器: 銅畵磁器)가 시도되었다. 홍무양식(洪武様式)은 원청화의 양식을 답습한 것이지만, 홍무연간(洪武年間, 1368-1398)에는 동화자기(銅畵磁器)를 좋아하여 교역품으로서의 청화자기는 적다. 주산(珠山)의 발굴에 의해 홍무연간(洪武年間)에도 대량의 대형자기의 생산이 입증되고 있다. 홍무양식의 청화나 동화(銅畵)의 주요무늬는 모란, 국화, 파초, 송죽매인 식물무늬가 중심이다. 명(銘)은 없다. 주요무늬의 주위등에 배치되는 무늬대(文様帯)는 모란당초문, 국당초문, 연변문, 초엽문(蕉葉文), 영지운문(霊芝雲文), 뢰문(雷文), 파도문(波濤文)등이 있고, 기형(器形)에는 대형의 발(鉢)과 반(盤), 호(壺), 옥호춘(玉壺春), 매병(梅瓶)등이 있다.

홍무연간(洪武年間)의 제품으로 남경홍무궁(南京洪武宮) 출토의 홍채용문반(紅彩龍文盤)의 도편(陶片)에는 백자위에 홍채(紅彩)로 오조(五爪:다섯개발톱)의 용이 그려져 있다. 우와에(上繪)기법은 기본적으로 홍무기(洪武期)에는 완성되었다고 생각되지만 2색, 3색과 복수의 색을 사용한 표현은 이 무렵에는 아직 일반적이지 않다.

영락연간(永楽年間, 1403-1424)에는 이른바「정화(鄭和)의 대원정(大遠征)」 라고 불리는 대함대(大艦隊)을 조직한 국가적인 무역이 행해졌다. 이것에 의해 이슬람권으로부터 코발트 수입이 재개된다. 「蘇麻離青」(수마르트靑料)라고 불리는 코발트는 망간의 함유량이 적고, 선명한 청남색(靑藍色) 을 띠고 있다. 영락연간(永楽年間)의 갈채(褐彩)나 홍채(紅彩), 금채(金彩)의 것이 경덕진의 어기창터(御器廠跡)에서 출토하고 있다. 도편(陶片)으로부터 우와에(上繪)기법에 의한 명쾌한 무늬 표현을 지향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단색의 우와에(上繪)기법도 활발히 시도되었지만, 청화가 무늬표현의 중심인 것은 변함이 없다. 종래 선덕기(宣徳期, 1426-1435)에 시작되었다고 했던 홍채(紅彩)나 홍유(紅釉)등이 영락기(永楽期)에 완성한 것을 알 수 있다. 영락기 독특의 첨백(甜白)이라고 불리는 백자에 홍유(紅釉)나 홍채(紅彩)로 무늬를 그린 것이다. 또한 황지녹채(黄地緑彩), 또는 녹지갈채(緑地褐彩)등도 영락기(永楽期)에 번조되었다.

영락연간(永楽年間)에는 백자나 홍유(紅釉)에 암화(暗花)로「영락연제(永楽年製)」라는 전서명(篆書銘)이 있는 것이 보이는데 관요명(官窯銘)을 쓴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 「선덕연제(宣徳年製)」,「대명선덕연제(大明宣徳年製)」 로 쓰게 되는 것은 선덕(宣徳)중기 이후의 어기창(御器廠)의 특징이다. 천구병(天球瓶)이나 편병(扁壺), 승모호(僧帽壺), 촉대(燭台), 대형의 반(盤)등 다채로운 기형이 보이고, 그곳에는 느긋하고 균형이 잡힌 필치로 속연문(束蓮文)이나 당초문(唐草文)이 그려져 있다. 또한, 「青花花鳥文盤」과 같이 장식적인 디자인을 넘어선 사실적인 회화표현도 나타나고 있다.

선덕기(宣徳期)에는 두채(豆彩)가 시작되는 등 실로 가지각색의 기법이 시도되고 있다. 경덕진의 출토품 중에는 선덕기(宣徳期)의 두채(豆彩)가 발견되고 있다. 이 두채(豆彩)는 청화(青花)로 윤곽선(輪郭線)을 긋고, 빨강이나 노랑, 녹색, 보라등으로 우와에(上繪)기법을 한 것이 있다. 그러나, 선덕연간(宣徳年間)의 두채(豆彩)의 전세품은 알려져 있지 않다. 선덕연간에는 청화로 모란문이나 훤초문(萱草文)등을 그리고, 바탕부분을 황채(黄彩)로 메우는 무늬표현이 완성된다. 이 그리는 방법은 선덕기(宣徳期)에 시작되고, 성화(成化), 홍치(弘治), 정덕기(正徳期)에도 계속되어 제작된다.

정통(正統, 1436-1449)・경태(景泰, 1450-1457)・천순연간(天順年間, 1457-1464)관요의 청화는 관요명이 없지만, 사서(史書) 나 경덕진의 발굴에서 가지각색의 제품이 활발하게 번조되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주산(珠山)에서의 발굴품을 보는 한 선덕기(宣徳期)와 같은 작풍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선덕기와 같은 장식성이 높고 치밀한 작품은 전해지고 있지 않다. 민요(民窯)에서는 인물문이나 운문(雲文)을 그린 「운도데(雲堂手)」등이 번조되었다.

성화기(成化期, 1465-1487)에는 선덕관요명(宣徳官窯銘)을 넣은 모방품(倣製品)이 만들어지는 등 선덕기를 계승한 것이 있다. 또한 비교적 소형의 제품이 많고, 전세품에서는 기형의 종류는 적으며 완(碗)이나 반(盤)에 뛰어난 것이 남아 있다. 특히 「팔레스 볼(Palace bowl)」이라 불리는 성화기의 완은 평가가 높다.

성화연간의 오채자기(五彩磁器)를 대표하는 두채(豆彩)는 전세품(伝世品)이 대단히 많지 않지만, 경덕진의 어기창(御器廠)에서는 굽만으로도 수만점이 출토하고 있다. 두채(豆彩)가 활발히 번조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은 어기창(御器廠)에서 제품의 선별이 얼마나 엄격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성화(成化)의 두채(豆彩)는 잔(杯)이나 완(碗)등의 소형의 것이 중심이다. 그리고 명초(明初)의 홍록채(紅緑彩)의 이로에자기(色繪磁器)가 여기에 와서 새롭게 색깔의 숫자가 늘어났다. 그것과 동시에 단색의 우와에(上繪), 황지청화(黄地靑畵)와 홍채(紅彩)도 활발히 번조되었다. 경덕진 어기창(御器廠)의 출토품에서는 성화연간(成化年間)의 이로에자기(色繪磁器)가 실로 풍부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채(五彩), 두채(豆彩), 청화홍채(靑畵紅彩), 황지자채(黄地紫彩), 황지녹채(黄地緑彩), 황지청화(黄地靑花)외에 가정연간(嘉靖年間)에 활발히 번조되는 홍지녹채(紅地緑彩)와 백자녹채(白磁緑彩)등도 만들어졌다. 또한, 「天」자 명(銘)이 있는 두채의 항아리도 다수 발견되고 있다. 전세하고 있는 성화연간의 두채는 화려함과 동시에 관요적인 품격이 있다.

계속해서 홍치(弘治, 1488-1505)・정덕연간(正徳年間, 1506-1521)에도 성화연간과 같은 생산이 계속되었다고 생각되지만, 전세품은 적고 황지녹채(黄地緑彩) 또는 황지청화(黄地靑畵)의 것이 눈에 띠는 정도이다.

경덕진에서는 관요인 어기창(御器廠)과 민요(民窯)에서 도자기생산이 행해져 왔다. 그러나, 가정연간(嘉靖年間, 1522-1566)경부터는 어기창(御器廠)에 번조명령이 방대한 양에 달했기 때문에 민간에 위탁 번조가 행해지게 되었다. 이른바 「관탑민소(官搭民焼)」의 제도가 정착해 가는 것이다. 그 결과 민요에 있어서는 생산기술의 습득과 품질관리라는 면에서 민요제품의 제작수준이 올라갔다. 그리고 고급품을 제작하는 관요가 부유계층의 수요에 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중에는 고아카에(古赤繪)등도 포함된다. 가정연간에는 다채롭고 화려한 오채자기(五彩磁器)가 각종 만들어지고 또한 무늬의 종류도 증대해 간다. 명대중기까지의 관요제품에 크게 보이는 용무늬나 봉황문, 화조문, 어초문, 연지수금문, 모란문등이 가정연간에는 다양한 변화를 보인다. 지금까지 관요의 전통적인 디자인을 모방하여 전해져 온 것인데, 가정연간에는 그 엄격한 작풍이 쇠퇴해 간다. 즉, 길상문등의 증가가 눈에 띠게 된다. 이것은 민요에 많이 보이는 경향이다. 또, 일본에서 킹란데(金襴手:이로에자기에 금박・금니로 그린 도자기)라고 일컫는 제품이 만력연간(万暦年間)에 걸쳐 만들어졌다.

융경연간(隆慶年間, 1567-1572)의 관요의 번조는 기록에서는 한번 만이었다고 하며 「대명융경연조(大明隆慶年造)」라는 명(銘)이 쓰여있다.

계속해서 만력연간(万暦年間, 1573-1620)의 오채자기(五彩磁器)의 번조는 현저하게 기종이 증대했다. 오채(五彩)로 생산된 것과 같은 기형이나 무늬가 청화로 만들어졌다. 특히, 준(尊)이나 향로(香炉), 촉대(燭台)등의 대형의 세간살이 종류나 필통, 벼루, 필가등의 문방구 종류가 눈에 띄게 된다. 무늬는 기면(器面) 가득히 그려넣는데, 그 화제(畵題)는 가정연간(嘉靖年間)의 것 외에 길상문의 백록도(百鹿図)와 백복도(百蝠図)등도 만들어진다. 그 외에, 투각기법의 제품도 보인다. 만력전기(万暦前期)의 작풍은 비교적 단정한 것이 많이 보이지만, 만력연간(万暦年間) 후반에는 가혹한 작업명령이 내리게 되자 작풍이 거칠게 된다.

계속해서 만력연간(万暦年間, 1573-1620)의 오채자기(五彩磁器)의 번조는 현저하게 기종이 증대했다. 오채(五彩)로 생산된 것과 같은 기형이나 무늬의 것이 청화로 만들어졌다. 특히, 준(尊)이나 향로(香炉), 촉대(燭台)등의 대형의 세간살이 종류나 필통, 벼루, 필가등의 문방구 종류가 눈에 띄게 된다. 무늬는 기면(器面) 가득히 그려넣는데 그 화제(畵題)는 가정연간(嘉靖年間)의 것 외에 길상문의 백록도(百鹿図)와 백복도(百蝠図)등도 만들어진다. 그 외에 투각기법의 제품도 보인다. 만력전기(万暦前期)의 작풍은 비교적 단정한 것이 많이 보이지만, 만력연간(万暦年間) 후반에는 가혹한 작업명령이 내리게 되자 작풍이 거칠게 된다.

경덕진의 민요에서는 명말(明末)에 「후요데(芙蓉手)」라고 불리는 대형의 반(盤)이 무역도자로서 생산되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의해 유럽등으로 수출되었다. 명말(明末)에는 관요를 대신해 민요의 생산이 활발하게 되어간다. 관요가 쇠퇴한 천계연간(天啓年間, 1621-1627)경부터 숭정연간 (崇禎年間, 1628-1644)에는 일본에서 「코소메즈케(古染付)」라고 불리우는 청화나 우와에(上繪)기법을 시행한 「텐케아카에(天啓赤繪)」가 만들어졌다. 또한 거기에 계속해 「숀즈이(祥瑞)」나 우와에(上繪)기법을 시행한「이로에숀즈이(色繪祥瑞)」도 만들어졌다. 난킹아카에(南京赤繪)는 넓게 유럽각지까지 수출되었다. 복건성(福建省), 광동성(広東省)의 각지 가마에서는 조제(粗製)의 오채(五彩)와 청화가 번조되었다. 그 중에서도 「고스데(呉州手)」, 「고스아카에(呉州赤繪)」라고 불리는 자기는 복건성평화현(福建省平和県)을 중심으로 한 장주요(漳州窯)등에서 16세기말경부터 17세기중엽에 걸쳐서 만들어져 각지에 수출되었다.

청조(清朝)의 초기에는 경덕진민요에서「트랜지셔날스타일 (과도기양식)」 이라 불리는 구미대상의 청화등이 구워졌다.

강희(康煕19년)(1680)경에는 어기창(御器廠)이 재개되고 경덕진은 활기를 띠게 된다. 만력연간(万暦年間)에 볼 수있는 삼채자기(三彩磁器)가 이 무렵에 더욱 세련되게 되며, 운용문(雲龍文)의 암화(暗花)에 석류를 그린 소삼채(素三彩)의 반(盤)이 대표적이다. 오채(五彩)에서는 무늬가 치밀하고 단정한 것이 늘어난다. 명대(明代)에서는 빨강・노랑・녹색・보라・흑색의 우와에(上繪)기법을 이용하였지만, 강희연간(康煕年間, 1662−1722)부터는 여러가지 색조(色調)의 것이 만들어졌다. 또한, 선홍색(鮮紅色) 이나 천청색(天青色), 교황색(嬌黄色)등의 단색유약의 것도 많이 만들어진다. 게다가 동(銅)이나 유리에 사용되고 있었던 법랑채(琺瑯彩)의 기법이 도자기에 응용되게 되었다. 이 법랑채(琺瑯彩)는 바탕을 경덕진에서 만들고, 궁정내의 내무부조판소법랑작(内務府造辨処琺瑯作)에서 그림을 그린 것이다. 이 법랑채의 기법을 기초로 해서 유상채(釉上彩)의 분채(粉彩) 기법이 경덕진에서 개발된다. 분채(粉彩)에 사용하는 불투명한 우와에(上繪)물감은 색깔 수도 많고 세밀한 묘사나 농담을 표현하는 기법에 적합한 것이다.

이 분채(粉彩) 기법은 강희연간(康煕年間)에는 시작되었지만, 옹정연간 (雍正年間, 1723-1735)에는 더욱더 미묘한 농담변화가 표현가능한 분채자기(粉彩磁器)가 다수 구워져 사실적인 화조문등이 그려졌다. 그 결과, 관요(官窯)의 청화자기는 새로운 기법적 전개도 없이 쇠퇴해간다. 분채(粉彩)의 등장에 의해 이로에자기(色繪磁器)는 하나의 정점에 이르렀다.

건륭연간(乾隆年間, 1736-1795)에는 그리는 화제(画題)는 더욱더 확대되고, 또한 분채(粉彩)의 기법도 한층 정밀한 것이 된다. 그 결과, 칠(漆)이나 돌, 나무의 질감을 모방한 오채자기(五彩磁器)마저 등장한다. 이것들 도자기는 어느 종류의 경쾌함과 취미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이것들을 도자기의 타락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전위적(前衛的)인 도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현대성이 있다.

건륭연간에 번조된 「고월헌(古月軒)」이라 불리는 것과 서양인물을 그린 병등도 궁정내의 법랑작(琺瑯作)에서 만들어진 법랑채(琺瑯彩)의 대표작이다.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