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자실 (조선시대・자기)

조선시대(1392〜1910)에는 가지각색의 도자기가 만들어졌는데, 일관 (一 貫)해서 생산되어 계속된 것이 백자이다. 특히, 15세기전반에는 「世宗朝(1419〜1450)의 어기(御器)는 오로지 백자를 사용한다」라는 기록을 뒷받침 하듯이 단정한 기형(器形)과 순백의 유조(釉調)가 뛰어난 백자를 만들어냈다. 이것들 상질(上質)의 백자는 경기도의 광주(広州)등 4개소에서 번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5세기중반부터 광주(広州)에서는 또한, 백자의 유약 밑에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그린 청화(青花)가 제작되었다. 이것들의 그림에는 수도에서 화원(画院)의 화가가 파견되어 붓을 들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고 뛰어난 필치의 작품이 약간 남아 있다.
16세기말부터 17세기초에 걸쳐 임진왜란, 정유재란과 청의 침략을 받아 한반도의 도자 생산은 거의 괴멸(壊滅)상태에 빠졌다. 이 시기 이 후, 관요(官窯)는 광주(広州)지구에 집중하게 된다. 그곳에서는 18세기전반경 온화한 유조(釉調)의 백자와 간결한 무늬의 청화(青花)가 번조되어, 중국도자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난 조선시대 독자의 미(美)의 세계를 완성했다. 한편, 17세기에는 청화의 안료인 회청(回青)이 부족했기때문에, 백자의 유약 밑에 철안료로 그림을 그리는 철화(鐵畵)가 광주(広州)를 시작하여 각지에서 활발하게 번조되었다. 18세기에는 마찬가지로 백자의 유약 아래 동(銅)안료로 그림을 그린 진사(辰砂)가 지방가마에서 만들어졌다. 1752년 이후, 광주관요는 분원리(分院里)로 이설(移設)하고, 안정된 생산태세가 정비되어 전성을 누렸다. 그러나, 1883년 국력의 쇠퇴와 더불어 분원리요는 민요(民窯)로 이관되어, 500년의 관요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